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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리더십: 신보수주의의 챔피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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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06. 17:52

강성학 웹용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쿠스(Archilochus)가 "여우(fox)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반면에 고슴도치(hedgehog)는 한 가지 큰 것만 안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여우보다는 고슴도치였다. 그는 오로지 철두철미 반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미국의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위대성에서 45명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제9위에 올랐다.

1930년대는 라디오 시대였다. 레이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루스벨트는 그에게 일종의 제2의 아버지였다. 대학 졸업 후 레이건은 라디오 방송을 시도하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데이븐포트(Davenport)에 있는 WOC(World of Chiropractic)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이오와대학교(University of Iowa)의 축구경기들을 중계하는 오디션(audition)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강인한 목소리와 즉흥적 능력이 방송국 운영자인 피트 맥아더(Pete MacArthur)에게 인상을 주었다. 1933년 초 WOC가 데스모인스(Des Moines)에 있는 보다 강력한 방송국인 WHO와 합병한 뒤에 레이건은 그 도시의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미국의 중서부지방에서 널리 들을 수 있었다. 따뜻하고 마음을 달래주는 그의 특별한 목소리는 라디오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자기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은 원고의 시작부분을 암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이른 성공을 가져온 것은 목소리의 음색만큼이나 자기 사고의 서술 기법이었다. WHO에서 레이건은 동료들을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영화에 있었다.

1936년 레이건은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s)의 스크린 테스트를 통과해 그곳에서 15년 동안 일했으며 41개의 영화에 출연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레이건의 신체보다는 그의 목소리에 의존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B급에 속했다. 레이건은 배우로서 자신의 능력을 믿었지만 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현실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서부영화에서 보다 드라마틱한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자기는 평균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레이건 배우경력의 최고의 역할은 킹스 로우(Kings Row)에서였다. 그 작품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으며 레이건을 정당한 스타로 만들었다. 1942년 그는 전쟁 중에 징집됐지만 새로 창설된 영화사의 육군공군부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1945년 9월 그의 군복무가 해제됐을 때 그의 직업은 모멘텀을 잃었다.

전후 미국 전역에서 노동투쟁이 기승을 부렸다. 할리우드에서 그 투쟁들은 전쟁 전에 이미 시작해서 1949년까지 계속됐다. 그의 배우로서 직업이 흔들리자 레이건은 자신이 속한 노조, 즉 영화배우협회(the Screen Actos Guild)의 이사회 회원으로서 그 투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동시에 미국재향군인회와 '할리우드 예술, 과학과 전문직업 독립 시민회(Hollywood Independent Committee of the Arts, Sciences, and Professions, HICCASP)'를 포함하여 그가 활동 중인 자유주의적 조직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 1946년 중반에 레이건이 집행위원회의 구성원이 되기로 동의했을 때 공산주의 동조자들은 그것을 전투조직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그의 첫 집행위원회 모임에서 레이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여배우 올리비어 드 하빌랜드(Olivia de Havilland)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성명서를 제안했다. 레이건은 곧 할리우드의 공산주의자들을 찾아내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연방정부당국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하원의 비-미국인 활동위원회가 1947년 10월에 영화산업에 대한 널리 홍보된 청문회를 열었을 때 레이건은 협조적 증인으로 워싱턴에 갔다. 그러나 그는 순종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레이건의 언행은 민첩했고 그 시대의 맥락에서 칭송할 만했다. 그는 다수의 반공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선전이 스크린에 도달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하면서 할리우드를 옹호했다.

1947년 레이건은 스스로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의 진정한 대변인이라는 '민주적 행동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의 국가이사회에 합류했다. 다음 해에 그는 사회적 소비예산을 줄이고 또 부자에 유리한 세금삭감을 통과시킨 데 대해 의회 공화당원들을 공격하는 연설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위한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나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 레이건의 견해는 전환하고 있었다. 그는 뉴딜 자유주의자로부터 자유주의적 반공으로, 즉 반공 보수주의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굳어진 견해는 할리우드 명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세운 조직인 영화산업협회의 대변인으로서 추가적인 역할을 반영했다. 그는 1949년에 그 협회의 의장이 되어 배우의 명예를 옹호하는 대중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할리우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공산당이 외국의 음모라는 근거에서 불법적이라고 선언하는 데 찬성했다. 1952년까지 5년간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뒤에 레이건은 더 이상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당원이었지만 공화당의 아이젠하워를 지지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결코 맥카시주의자(McCarthite)는 아니었다. 1952년 3월에 레이건은 1949년 처음 만나 여배우 지망생 낸시 데이비(Nancy Davis)와 재혼했다. 그는 부인 낸시의 무조건적 경배에 의존했으며 그는 비로소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얻었다. 레이건의 당시 사고방식에서 보다 흥미로운 전환은 보다 넓은 공공철학을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1952년 윈스턴 처칠이 불멸의 '철의 장막' 연설을 했던 미주리 주의 풀턴에서 기독교 여자대학인 윌리엄 우즈대학(William Woods College)에서 행한 졸업식 연설에서 처음으로 표출됐다. '아름다운 미국(America the Beautiful)'이라는 제목의 그 연설은 미국에 대한 그의 개념을 발전시킨 첫 연설이고 첫 장소였다. 그는 미국을 하나님에 의해 약속받은 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이 땅은 지상에서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라"는 링컨의 1862년 연설을 원용했으며 그 후 그는 그것을 되풀이하여 사용했다.

1950년 초에 할리우드는 뉴욕에서 등장한 새로운 텔레비전 산업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1954년 레이건은 그가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워너 브라더스로부터 해고됐다. 레이건은 아주 어려울 때 잠시 그가 경멸하던 밀짚모자와 보우타이를 하고 라스베이거스 야간업소 진행자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54년 그는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광고 대행사에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자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1962년까지 일했다. 레이건은 이곳에서 8년 동안의 경험을 일종의 정치학에서 대학원 과정이었다고 서술했다. 즉, 그때 그의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는 비행기를 두려워했기에 그의 계약은 기차여행을 명시했다. 긴 기차여행 시간 동안에 그는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쓸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는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의 '증인(Witness)', 하이에크(F. A. Hayek)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그리고 언론인,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이 쓴 '경제학 1교시(Economics in One Lesson)'를 사실상 통째로 암기했다고 한다.

1955년과 1956년 레이건은 간극이 메꿀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넓었기에 자기는 더 이상 민주당원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1957년 그의 모교인 유레카 대학의 졸업식 연사로 돌아왔다. 그의 연설은 5년 전 풀턴에서 했던 연설을 상기시켰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이에크와 해즐릿에 듬뿍 젖은 레이건은 무신경과 무관심 속에서 잃어버린 자유에 관해서 '외부의 적'보다 더 염려했다. 그는 미국이 하이에크의 '노예로 가는 길'에 상당히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인민들이 미국의 생활수준에서 바닥을 건설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천정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1952년의 '아름다운 미국'이라는 레이건의 연설의 주제가 1957년에는 '추악한 정부(Government the Ugly)'가 연설의 주제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 뉴딜 자유주의와의 결정적인 레이건의 결별이 이루어지고 철학적 대안의 첫 개발 된 표현이 등장했다. 1959년 뉴욕에 있는 월도르프-에스토리아 호텔에서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 간부들에게 행한 연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산주의와 정부팽창의 위험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196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지지했을 때 그는 이미 완전히 전향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1962년에 마침내 정당을 바꾸었다.

1960년대 초까지 레이건은 배우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64년 그가 당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인 베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지원연설을 하면서 완전히 변했다. 1964년 10월 27일 사전에 녹음된 '선택할 시간(A Time for Choosing)'이라는 제목의 연설은 레이건의 수사학적 독특한 재능을 최고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자유주의를 공격했다. 그는 연설 중에 플루타크(Plutarch)를 인용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인민들 자유의 진정한 파괴자는 인민들 사이에서 포상금, 기부와 혜택을 퍼트리는 자들"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국부들은 정부가 인민들을 통제함이 없이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가 그런 일에 착수할 때 정부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력과 강제력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레이건은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할 시간에 왔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사회주의를 부과하는 최선의 방법은 세금으로 중산층을 말살하는 것이라는 칼 마르크스 말도 인용했다. 골드워터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에게 패배했지만 레이건의 이 연설은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감상적이고 충격적인 연설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하여 레이건은 즉시 정치의 최전선으로 나아갔다.

1965년 레이건은 자신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갈 것임을 선언했다. 민주당 후보인 브라운(Brown) 주지사가 레이건을 멍청한 배우라고 부르면서 정부 일의 무경험을 조롱하고 그를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매도했지만 선거에서 레이건은 650만 투표가운데 100만의 표 차이로 승리했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레이건은 "잘 모르겠다. 나는 주지사 역을 해본 적이 없다"고 재치 있게 대답했다. 레이건은 정부가 사적인 이니셔티브를 지원할 것이라는 '창조적 사회(Creative Society)'라는 모토로 출마했지만 실제에서 그의 비전은 곧 통치의 현실에 굴복했다. 1968년 레이건의 전국적 프로필은 버클리시(市)에서 인민들의 공원(People's Park)에 대한 점령을 끝내기 위해 주방위군을 소집한 결정으로 정의되었다. 그것은 평화적 반대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만 파괴에는 무관용이라는 입장이었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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