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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현지시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전날 발표된 필리핀 중간선거 최종 보고서에서 EU 선거감시단은 "필리핀의 정치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 가문에 집중돼 있다"며 이 같이 지적했다. EU 선거감시단은 필리핀 정부의 초청으로 지난 5월 중간선거를 감시했다.
유럽의회 의원이자 수석 감시원인 마르타 테미도는 정치적 권력이 정치가문에 집중돼 있다며 "시민 사회 단체에 따르면 이들은 직전 의회에서 5석 중 4석을 차지했고 소외 계층을 위해 마련된 비례대표 의석의 3분의 2마저 이들의 몫이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필리핀 유권자들이 중간선거 역대 최고 투표율(81.65%)을 기록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고 평가하면서도 고질적인 금권 선거·선거 관련 폭력과 1985년에 제정된 낡은 통합선거법이 선거 과정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테미도 의원은 헌법에 명시된 정치 가문 제한 규정이 사실상 사문화되면서 정치적 다원성이 훼손되고 신인 정치인의 진입이 극도로 어려워졌다며 "선거가 엘리트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대중들의 환멸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왜 필리핀은 왕조와도 같은 특정 가문들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는 '가문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전문가들은 이런 정치 가문의 힘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부유한 지주 엘리트들이 경제와 정치를 모두 장악했던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필리핀 특유의 '후견주의 민주주의'도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매튜 다비드 오르도네스 드라살 대학 정치학 강사는 "공공 서비스가 부족한 농촌 지역에서 유권자들은 생존을 위해 특정 정치 가문에 의존한다"며 "오랜 가문일수록 신인 정치인보다 더 확실하게 '정치적 서비스'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노 트리니다드 마닐라 아테네오 대학교 정치학 강사도 "정치인들은 정부 예산으로 진행되는 사회기반시설 사업이나 구호 물품 등에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새겨넣어 마치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온 선물인 것처럼 포장한다"며 "유권자들이 해당 정치인에게 개인적인 빚을 졌다고 느끼게 만든다. 감사와 수치심 같은 문화적 가치를 이용해 지지를 강화하는 것"이라 짚었다.
이러한 현실에 정치 가문을 막을 수 있는 구조적·법적 제약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장치들을 만들 수 있는 상·하원의원 대다수가 바로 그 정치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정치 가문이 지배적이지만 무적은 아니다"라고 짚는다. 최근 선거에서 27년간 파시그 지역을 지배하던 에우소비오 가문을 꺾은 비코 소토 시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낡은 통합선거법 개정 ▲왜곡된 비례대표제 개혁 ▲정부 사업에 정치인 이름 사용 금지법 제정 등 실현 가능한 대안부터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보고서는 "이를 통해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고, 유권자들이 '가문'이 아닌 '정책'을 보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리핀 민주주의의 시급한 과제"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