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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하 한국디지털자산평가인증 전문위원 / 前 감사원 특조국장 |
새 정부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를 본격 추진하면서 일부 금융권과 언론에서 불안과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 '코인런', '통화정책의 약화', '외환시장 불안정'이라는 익숙한 프레임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 두려워해야 할 것은 새로운 기술일까, 아니면 준비 없는 두려움 그 자체일까.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원화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다. 원화를 디지털 경제의 플랫폼에 맞게 확장·진화시키는 새로운 그릇이다. 지금까지 원화는 지리적 경계 안에서만 기능했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에서는 통화의 경쟁력은 물리적 국경이 아니라, 기술적 확장성과 국제 신뢰도에 의해 좌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결제 수단이 아닌, '국가가 보증한 디지털 원화'로서, 실시간성과 불변성, 투명성을 갖춘 프로그래머블 원화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원화의 국제화를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오랜 기간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안고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은 그 자체가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비용이다. 안전자산 중심의 외환보유고는 수익률이 낮고, 대부분 선진국의 국채나 외화예금 등 외부 자산에 묶여 있어 내부 순환이 어려운 자금이다.
만약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국제간 결제와 거래에서 실제로 활용되기 시작한다면, 이는 원화의 국제 신뢰도를 높이고 외환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외환보유액의 비중과 규모를 전략적으로 축소할 수 있으며, 줄어든 외환보유분은 국내 인프라 투자, 전략 산업 육성, 국부펀드 운용 등으로 전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테이블코인은 소극적 외환 방어의 시대에서, 능동적 국부 운용의 시대로 전환하는 기폭제가 된다.
기업은 결제 속도 향상, 거래비용 절감, 계약 자동화, 외환 리스크 회피 등의 측면에서 직접적인 이익을 보게 된다. 특히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에게는 은행을 거치지 않고 국경 없는 거래를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된다. 이는 수출입 거래의 실질 효율성을 높이는 '결제 혁신'이다.
가계 입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새로운 결제수단이 아닌 '금융에 대한 접근성' 자체를 높이는 수단이다. 금융 소외계층, 청년층, 고령층, 외국인 노동자 등이 기존 시스템보다 더 쉽고 안전하게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으며, 국가가 보증하는 디지털 통화라는 점은 심리적 안정성까지 제공한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보조금 지급, 세금 징수, 긴급지원 등은 정책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동시에 모든 거래가 기록되고 감사 연동이 가능한 시스템은 재정 낭비와 부정 수급을 최소화하고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수단이 된다.
국가 전체로 보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금융 주권의 강화, 디지털경제 주도권 확보, 외환안정성 제고, 글로벌 자금 유치 플랫폼이라는 다층적 이익을 제공한다. 이는 곧 대한민국이 '기축통화국이 아니어도 디지털 통화 질서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
앞으로 디지털화폐, CBDC, 스테이블코인이 얽히는 통화 패권 경쟁에서, 우리는 '디지털 원화'라는 깃발 아래 국익을 설계하고 방어할 수 있다. 외환보유액에 발목 잡히는 국가가 아니라, 원화를 전 세계와 자유롭게 연동시키는 '경제 소프트 파워'를 구축하는 국가로 도약하는 것이다.
새 정부가 구상하는 디지털자산위원회는 단지 감독기구가 아니라 디지털 금융 대전환의 사령탑이다. AI 기반 정책 시뮬레이션, 규제샌드박스, 실시간 감사체계와의 통합은 전례 없는 '스마트 통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그 하에서 설계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그 어떤 기존 디지털자산보다 안전하고, 제도화 가능하며, 국익 중심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진짜 위험은 통제 가능한 변화를 거부하거나, 앞서가는 국가들을 멀찍이 지켜보기만 하는 태도 그 자체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가 주목하는 교차로에 서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단지 금융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할 기회다. 그 기회를 회피의 대상으로 보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수십 년간 자본자유화, 외환거래 자유화, 핀테크 활성화 등 수많은 금융혁신의 도전을 수용했다. 그때마다 처음에는 반대와 우려가 컸지만, 제대로 된 거버넌스와 제도 설계로 오히려 기회를 만들고 국부로 전환해냈다.
이번에도 해낼 수 있다.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더 큰 국익을 설계하자.
/ 이영하 (한국디지털자산평가인증 전문위원/ 前 감사원 특조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