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조선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기원을 되묻는 질문에서 시작된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은 연출가 김정숙이 15년 이상 고전 여성서사에 천착하며 구축해온 연극 세계의 집약판이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심청전을 짓다' 등을 통해 인간 존재와 사회 구조를 치열하게 조명해온 그는 이번에도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잊힌 존엄을 되살리는 무대를 구축했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홍길동을 낳은 종년 '춘섬'이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모성의 기원을 사회사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홍길동의 어머니는 누구였을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흙수저'로 태어나 사랑도 미래도 빼앗긴 한 소녀 '춘섬'이 거짓말로 진실을 지키며 스스로 운명을 써 내려가는 여정을 따라간다.
김정숙 선생님 작,연출_대표사진
0
극작과 연출을 맏은 연출가 김정숙 / 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고전 속 인물에게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고 비가시화된 존재에게 목소리를 내주는 김 연출가의 작업은 단지 복원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재해석하고 감각하는 하나의 통로다. '춘섬'이라는 인물은 '홍길동전' 원작에서 몇 장면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김 연출가는 그 짧은 기록 너머에 존재했을 한 여인의 삶과 결단, 침묵과 연대를 탐색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춘섬이의 '거짓말'은 아이를 살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자 타인의 욕망과 억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정의하는 고유한 언어였다"며 "그 안에 숨은 상처와 연대의 감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했다. 기만과 왜곡의 이미지로 읽히는 거짓말이 춘섬이에게는 생존의 언어이자 타인의 시선에 갇힌 삶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능동적인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김 연출가는 작품이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현재의 관객과 호흡하는 동시대극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서사에 갇혀 있다. 정보의 과잉과 서사의 상실, 자기 이야기의 부재는 현대인의 정체성 위기를 더욱 깊게 만든다"며 "작품 속 춘섬이가 이제부터는 내가 내 이야기를 짓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오늘의 관객에게 건네는 직접적 메시지다. 삶의 서사를 되찾는 일, 존재의 조건을 스스로 정립하는 일이 왜 절실한지를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김 연출가는 춘섬을 통해 단지 출산이나 양육의 기능이 아닌 존재를 지키는 윤리적 태도로서 모성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저출산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어머니가 불행해 보였기 때문에 나도 되고 싶지 않다'는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며 "춘섬은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해 자발적 결단으로 어머니가 되기를 선택한다. '모성의 존엄'을 회복하는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숙 선생님_연습지도 사진2
0
극작과 연출을 맏은 연출가 김정숙 / 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고전과 현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문학과 연극 사이를 건너는 인문학적 여정이다. 김 연출가는 "고전을 만나는 일은 결국 '나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이라며 "춘섬이의 눈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고 각자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 삶을 짓고, 존재의 존엄을 되찾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조선여자전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으로 25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