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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로 읽는 도시와 감정의 풍경.. ‘애호가 편지’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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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29. 13:4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빠키, 메이와덴키, 이박사까지
기억과 기술, 색과 소리가 엮어낸 감정의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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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애호가 편지'의 입구 전경. '팬레터(Fan Letter)'라는 낱말이 시각적으로 강조된 대형 설치는 관람객에게 트로트와 뽕짝의 정서를 담은 예술적 헌사를 예고한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선보인 전시 '애호가 편지'는 트로트에 보내는 진심 어린 헌사이자,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든 대중음악에 대한 예술적 기록이다. '애호가 편지'라는 제목은 1900년대 초, 팬레터를 일컫던 표현에서 유래한 말로, 이번 전시는 음악과 도시, 그리고 사람의 관계를 탐색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재구성된다. 이 편지는 트로트를 통해 살아온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이며, 동시에 시대를 함께 건너온 도시민의 감정과 기억을 되짚는 문화적 성찰이다.

전시는 '트로트와 도시 소리 풍경'과 '경계를 넘나드는 아시아 뽕짝'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총 14종의 현대 매체 예술 작품이 배치돼 있다. 여기에 ACC가 수년간 축적해온 아카이브를 활용한 '아시아 대중음악 컬렉션', 그리고 국내 최장수 음반사와 협업한 '오아시스레코드로 보는 트로트의 역사와 변천'이라는 두 개의 연계 전시가 더해지며, 총 16종의 콘텐츠가 서로 다른 결을 이루며 관람객을 맞는다.

'트로트와 도시 소리 풍경'은 오랜 시간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해온 트로트가 도시 속에서 어떤 풍경과 감정을 품어왔는지를 다룬다. 반면 '경계를 넘나드는 아시아 뽕짝'은 트로트와 유사한 정서와 형식을 지닌 아시아의 대중음악을 조망하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 문화권의 공감대를 드러낸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캐나다 등 5개국 13팀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다양한 매체와 기술을 활용해 도시인의 삶을 투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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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구조를 연상시키는 복합전시2관 내부. 공간 전체가 화려한 문양과 색채로 단장돼 있으며, 감각적 몰입을 유도하는 동시에 작품 감상의 무대가 된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전시가 열리는 복합전시2관은 파놉티콘 구조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형태로, 관람자가 수직적이고 입체적으로 작품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작품을 정면에서 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며 감상할 수 있는 공간 구조는 관객의 움직임 자체를 작품 감상의 일부로 만든다. 전시 공간은 때로는 무대이자 콘서트장이 되기도 하며, 도시민의 일상을 축제처럼 환기시킨다. 장애인을 위한 큰 글씨 도록과 점자 해설, 수어 영상 등 다양한 접근성 콘텐츠도 마련돼 있어 모두가 함께 전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도슨트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되며,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해를 한층 돕는다.

전시의 첫 관문을 여는 작품은 '트랜스로컬 댄스 마차'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곧장 마주하게 되는 이 설치는 아시아 로컬 사운드의 생동감을 집약한 청각적 축제 공간이다. 독특한 장식과 함께 DJ 콘솔을 연상케 하는 인터페이스를 갖춘 이 작품은 관람자가 직접 화면을 터치해 트로트, 태국의 모람, 베트남의 비나 하우스, 필리핀의 부돗, 펑크풍 등 아시아 각지의 사운드를 조합해 자신만의 '트랜스로컬' 댄스 음악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한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참여형 매체로서 음악을 '만들고 체험'하게 하는 이 설치는 탈서구 중심적 음악 감각을 제시하며, 동시대 감상의 다원성과 상호작용성을 일깨운다. '하류지락 지대론(下流之樂之大本)'이라는 가상의 문구는 민중적 정서의 가치와 하위문화로 치부되던 트로트의 미학적 가능성을 유쾌하게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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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로컬 댄스 마차'. 아시아 각지의 로컬 사운드를 믹싱할 수 있는 체험형 콘솔이 설치돼 있으며, 관람객은 직접 음악을 만들며 문화적 상호작용을 경험한다.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빠키(VAKKI)의 '딴따라-딴따'는 이번 전시 '애호가 편지'의 미학적 정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대표작이다. 화려한 색상과 반복적인 도형 패턴, 기하학적으로 구조화된 오브제들, 그리고 움직이는 조명과 미러볼이 만들어내는 빛의 파동은 공간 전체를 감각의 리듬으로 감싸며 단번에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찬란한 시각적 경험 위에 겹쳐지는 것은 놀랍도록 정제된 트로트의 선율이다. 밝고 경쾌한 시각적 언어와 서정적이고 아련한 음악이 교차하며, 작품은 이질적 감정의 충돌과 융합을 유도한다.

'딴따라-딴따'는 단지 눈에 보이는 형식미의 장치가 아니다. 이 작품은 대중음악, 특히 트로트를 둘러싼 도시의 정서와 그 파편화된 감각들을 예술적으로 번역한다. 작가 빠키는 자신만의 언어인 색채 리듬과 반복적 구조를 통해, 현대 도시인이 느끼는 불안, 고립, 흥겨움, 회복력 같은 감정을 포착해낸다.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가 스쳐 지나쳐온 삶의 단면들이 이 작품 안에서 시각적으로 재구성되고, 트로트라는 음악이 지닌 정(情)과 한(恨)의 정서가 새로운 감각의 언어로 전환된다.

여기서 '딴따라'라는 단어는 더 이상 폄하의 언어가 아니다. 빠키는 이 낡은 표현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대중문화의 감정적 힘과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찬사로 승화시킨다. 반복되는 기호와 색의 흐름, 그 속에 섬세하게 깃든 감정의 결은 전시 제목 '애호가 편지'와 맞닿는다. 한때 낮은 문화로 취급되었던 대중음악의 정서가, 이곳에서는 도시와 사람을 잇는 정제된 위로의 언어로 변주되고 있다. SNS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이 작품은, 그저 포토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눈으로 보고, 음악을 들으며,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되새기는 도시인의 감정 지도다. '딴따라-딴따'는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트로트의 세계를, 새로운 미적 차원에서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마주침은 전시 전체의 감성적 무게 중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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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키의 작품 '딴따라-딴따'. 강렬한 색채와 구조적 리듬, 미러볼과 조명 속에서 트로트의 정서가 시각적 언어로 재탄생한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이후 이어지는 '메카 트로트'는 테크노 트로트라는 장르를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서 구현한 설치 작품이다. 일본의 예술집단 '메이와덴키'와 한국의 '이박사'가 협업했던 곡 '나는 우주의 환타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로봇 연주자들이 트로트 리듬에 맞춰 움직이며 기계적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푸른 제복의 로봇과 중절모를 쓴 인물형 로봇은 과거 이박사의 파격적인 무대를 연상시키며, 전자음과 감정이 교차하는 테크노 트로트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통과 현대, 감성과 기계, 음악과 기호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실험은 대중문화가 갖는 진화 가능성을 탁월하게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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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 트로트'는 이박사와 메이와덴키의 협업을 바탕으로 제작된 로봇 연주 퍼포먼스. 전자 장치가 트로트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며 인간과 기계의 감정을 넘나든다. /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 동선은 2층으로 이어지며 '경계를 넘나드는 아시아 뽕짝'이라는 주제 아래 보다 확장된 감각의 장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아시아 대중음악의 정서와 그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는 다섯 점의 영상 및 설치 작품이 소개된다. 그중 일렉트로니코스 판타스티코스!(ELECTRONICOS FANTASTICOS!) 그룹의 '전자 선풍기 하프: 빛과 그림자의 음계'는 폐기된 전자기기를 악기로 전환한 작품으로, 관람객이 선풍기에 직접 불빛을 비추면 진동과 함께 사운드가 발생하는 참여형 사운드 설치다. 버려진 물건이 악기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기술과 예술, 오브제와 인간 감각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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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로니코스 판타스티코스!의 '전자 선풍기 하프: 빛과 그림자의 음계'. 관람객이 직접 소리와 빛의 상호작용을 체험할 수 있는 설치 작품이다. /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외에도 '변 천사 별곡', '무시로', '소릿귀가 열린다'와 같은 작품들이 트로트와 뽕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서민 음악이 지닌 정서적 깊이와 사회적 함의를 되짚는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당둣(Dangdut), 베트남의 볼레로 등 아시아의 지역 음악 문화를 조명하는 '다이렉트#1 조겟 당둣', '볼레로 효과' 등의 작품도 전시를 통해 함께 만날 수 있다.

연계 전시 또한 주목할 만하다. 'ACC 아카이브: 아시아 대중음악 컬렉션'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수년간 수집한 아시아 4개국의 대중음악 자료를 통해 각국의 음악 속 감정의 흐름을 살핀다. 사랑, 이별, 상실 등 트로트와 닮은 감성을 지닌 이들 음악은, 서로 다른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연계 전시 '오아시스레코드로 보는 트로트의 역사와 변천'은 국내 최장수 음반사 오아시스레코드의 아카이브를 통해 트로트의 시대별 변화를 조명한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트로트를 이끈 가수들의 음반과 공연 자료, 심의서, 계약서 등 귀중한 자료를 통해 트로트가 어떻게 시대의 감정과 정서를 담아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중의 호응 속에 변화해왔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형성기부터 토착기, 융합기, 도약기, 확장기에 이르는 여섯 개의 섹션은 트로트를 하나의 장르를 넘어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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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연계 전시 'ACC 아카이브: 아시아 대중음악 컬렉션' 공간 전경.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미얀마의 음악 자료가 소개되며 아시아 뽕짝의 감정적 결을 조망한다. (下) 연계 전시 '오아시스레코드로 보는 트로트의 역사와 변천'.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트로트 장르의 흐름과 정체성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조망한다. /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번 전시는 단순한 향수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트로트를 통해 일상의 감정을 해석하고, 도시의 기억을 재조명하며, 문화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예술의 장으로 기능한다. 트로트는 '딴따라'라 불렸던 대중의 음악이자, 고단한 삶을 이겨낸 감정의 언어였으며, 이 전시는 그 정서를 다시 불러내는 회랑이다. 나훈아와 남진, 현철과 주현미, 그리고 오늘날의 임영웅과 정동원까지. 세대를 관통해 함께 불러온 그 수많은 노래들은 이제 하나의 예술 언어로 승화돼 관람객을 맞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애호가 편지'는 트로트라는 매개를 통해 도시와 사람, 기억과 감정을 잇는 전시다. 음악이 주는 위로와 예술의 힘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전시는, 우리가 사랑해온 노래에 보내는 아름다운 답장이자, 우리가 살아온 삶에 건네는 조용한 인사이기도 하다. 오는 8월 24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지금 우리가 어떤 감정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묻는 동시에, 그 감정의 이름을 트로트라는 선율로 부드럽게 부른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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