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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SK하이닉스는 매출 66조원, 영업이익 23조원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대한민국 경제의 기둥이 됐다. 세계 반도체 매출 4위, D램 부문 세계 1위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SK하이닉스 이천 단지에는 협력사를 포함해 3만여 명의 가족이 터를 잡고 있다. 지난 9년(2016~2024년)간 이천시에 납부한 지방세만도 1조4000억원에 달한다.
이 같은 성과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SK하이닉스가 이천 땅에서 태동하게 된 운명적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각종 규제의 벽 앞에서 "안된다"는 말 대신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자"던 어느 말단 공무원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이천시의 미래,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상기시키는 그 벅찬 기억 말이다.
1993년 9월, 이천군청의 최하위직 공장 인허가 담당자였던 필자를 찾아온 당시 현대전자산업 관계자는 "(반도체)공장을 더 지어야 하는데 허가된 건축 면적이 너무 작다"며 증설할 방법이 있는 지 여부를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관련 법규는 냉혹한 벽이나 다름 없었다. 1983년 7월부터 시행된 수도권정비계획법과 공업배치법은 이천과 같은 수도권 자연보전권역 내 공장 증설을 철저히 옭아매고 있었다. 현대전자는 법 시행 전 이미 법적 상한을 훨씬 초과하는 면적을 허가받았기에, 단 '1평'의 부지나 건축면적도 늘릴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으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 절박한 심정이 안타까워 담당 계장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이어가던 중 문득 '이미 허가된 부지 안에서 공장건물 면적만 늘리는 건 어떨까'라는 묘안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역발상이었다. 우리는 현대전자 측에 소관부처인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에 직접 질의를 해볼 것을 제안했고, 몇 달 후인 1994년 1월 '가능하다'는 내용이 담긴 회신문을 받는데 성공했다.
기적의 문이 열린 순간이었지만, 흥분은 금물이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회사 측에 눈앞의 증설만 생각하지 말고 좀더 멀리 내다보라고 조언했다. 특히 이천 공업지역의 용적률 300%까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앞으로 필요한 모든 미래의 면적을 최대한 담은 건축계획을 가져올 것을 주문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기존의 1.5배가 넘는 78만8693㎡의 공장 건축면적을 추가로 확보됐다. 총 면적 130만5880㎡라는 실로 거대한 증설 계획이 승인된 것이다. 그때의 결정이 30년 후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의 운명을 가를 위대한 씨앗이 될 줄은 당시엔 그 누구도 몰랐다.
만약 그때 필자를 비롯해 담당 공무원 모두가 법령만을 내세워 '불가'라는 답변만 반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훗날 SK가 하이닉스 인수를 검토할 때 약 40만㎡의 M14 공장과 약 50만㎡의 M16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이 '미리 확보된 건축면적'이 없었다면 투자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역의 발전과 국가의 미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최일선에서 묵묵히 일하는 공직자들의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새삼 느끼곤 한다. 부디 지금의 이천시 공직자들도 더 많은 기업을 유치하고, 또 SK하이닉스가 이천에서 공장운영을 편히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힘써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