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올의 실험, 공예를 ‘살아 있는 기술’로 되살린 4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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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은 2000년대 이후 '메티에 다르(Metiers d'Art)'를 기업 전략의 핵심에 두고 주요 아틀리에를 인수·보존해왔으며, 2021년 파리 오베르빌리에 개관한 르 19M(le 19M)을 통해 장인 정신의 전승을 본격화했다.
자수·깃털·플리세·밀리너리·골드스미스·슈즈 등 전통 장식 공예 아틀리에들이 입주한 이 건물은 작업과 교육, 연구와 전시, 공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복합 플랫폼이다. 특히 '라 갈레리 뒤 19M(La Galerie du 19M)'는 일반 대중을 위한 전시와 워크숍,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장인의 기술을 사회적 지식 자본으로 확장한다.
그 연장선에서 한국에서 4년째 이어지고 있는 협업이 바로 예올×샤넬 프로젝트다. 샤넬은 글로벌 인프라와 전략을 제공하고, 예올은 한국 공예의 전통과 장인 네트워크를 연결해 함께 시너지를 낸다. 단순한 후원이 아닌 장기 지원과 다학제 협업, 전시와 유통의 결합을 시도하며, 전통 공예가 오늘의 맥락에서 다시 호흡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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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제목 그대로 동아시아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치유·질서·균형의 감각을 환기시킨다. 종이와 금속, 서로 다른 물성이 자연 속에서 본래 그러하듯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시각화했다.
총괄 디렉터는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Architectural Digest)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100대 디자이너'에 선정된 양태오가 맡았다. 그는 민화적 세계관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의 기호를 재료와 공간에 배열해 종이의 숨결과 금속의 흐름을 공간의 리듬과 겹쳐 놓음으로써, 전시 전체를 재료·장인·공간의 삼각 편성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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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박 장인은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 꽃과 풀, 바람과 구름을 모티프로 한 기물을 선보였다. 단순하면서도 정겨운 형상은 소박해 보이지만, 표면에 드러난 결은 오랜 손끝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는다. 한지를 겹겹이 붙인 뒤 전통적으로 쓰여온 자연 재료로 마감해 방수와 내구를 높이는 방식은 지호공예가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기법임을 보여준다. 느리게 쌓이고 말리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얼굴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시간의 미학'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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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주조 과정을 직접 수행해 주석으로 제작한 의자와 테이블을 선보였다. 주석은 손길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는 성질을 지녔는데, 그는 이를 통해 금속의 '길들여짐'을 탐구한다. 단단하면서도 사용자의 삶에 응답하며 변화하는 물건, 쓰임과 감응 속에서 정체성이 갱신되는 오브제는 금속을 매개로 삶의 유동성과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박갑순의 종이가 시간의 결을 통해 온기를 전한다면, 이윤정의 금속은 움직임과 접촉을 통해 오늘의 리듬을 받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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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업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축은 예올이다. 2002년 설립된 예올은 '예로부터 이어받은 아름다움을 오늘과 내일에 올곧게 전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활동해온 비영리재단이다. 2010년부터는 매년 '올해의 장인'을, 2013년부터는 '올해의 젊은 공예인'을 선정해 공예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구조를 구축해왔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예올은 장인과 신진 작가를 연결하는 한국적 뿌리를 제공했고, 샤넬은 이를 글로벌 인프라와 결합해 확장 가능한 플랫폼으로 만들었다.
예올×샤넬 프로젝트는 단순한 전시를 넘어선다. 전통 기술은 샤넬의 글로벌 전략과 만나 사회적 번역을 거치며, 결과적으로 공예가 오늘을 살아 있는 기술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갑순의 지호공예와 이윤정의 금속 작업은 전통이 단절이 아닌 변주의 반복을 통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올은 그 변주의 씨앗을 뿌리고, 샤넬은 이를 지속 가능한 구조로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결국 이번 전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전통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기술로 살아 움직이며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