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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9. 16. 14:37

아름지기 '장, 식탁으로 이어진 풍경' 기획전
간장·된장 등 10가지 장과 음식이 빚어낸 생활문화의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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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아름지기 전시 자료를 아카이빙한 공간.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장은 한국인의 밥상을 지탱해 온 가장 오래된 맛의 언어다. 집집마다 장독대에서 익어가던 간장과 된장, 고추장은 단순한 발효 식품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과 지혜를 품은 생활문화였다. 발효는 기다림의 미학이고, 장은 그 기다림 속에서 축적된 공동체적 경험의 산물이었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라는 속담에서 보듯, 장은 한 집안의 살림살이와 기풍을 대변하는 지표였고, 집과 마을을 이어주는 일종의 신뢰 자산이기도 했다.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한국의 장 담그기'가 등재되면서, 장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단순한 전통 발효식품이 아니라 공동체적 지혜와 삶의 윤리가 배어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이 국제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마련한 2025 기획전 '장, 식탁으로 이어진 풍경'은 장을 오늘의 식탁에서 어떻게 다시 호흡시킬 수 있을지를 탐색하는 자리다.

전시는 오는 11월 15일까지 아름지기 통의동 사옥에서 열린다.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주최하고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이 협력했으며, 까르띠에와 이건박영주문화재단,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으로 참여했다. 전시 자문에는 신연균, 정혜경, 박경미가 함께했다.

이번 전시는 2004년부터 의식주를 순차적으로 조망해 온 아름지기의 장기 프로젝트 가운데 일곱 번째 '식(食)' 전시에 해당한다. 오랜 시간 의·식·주를 삶의 총체로 다뤄온 기획의 연장선에서, 장은 한식의 본질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뿌리이자 오늘의 식문화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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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소개된 열 가지 장. / 사진 재단법인 아름지기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1층 중앙에 놓인 커다란 흰색 테이블이다. 이곳에 마련된 '열 가지 장, 열 가지 음식' 섹션은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테이블 위에는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맛공방이 선별한 열 가지 장과 그에 어울리는 열 가지 음식이 차분하게 놓여 있다.

간장·된장·고추장·청국장처럼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장이 있는가 하면, 두부장·대구장·천리장·등겨장·어육장·즙장처럼 상대적으로 낯선 장들도 소개된다. 전시는 발효의 원리나 장 담그기의 기술적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장이 어떤 음식을 만날 때 제맛을 드러내는지를 구체적 상차림으로 보여준다. 관람객은 발걸음을 옮기며 음식과 장의 조합이 전하는 인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맛을 떠올리며 감각의 결을 완성해 간다.

흰죽과 청장의 조합은 전시의 태도를 압축하는 상징 같은 장면이다. 순백의 죽 위에 맑은 청장을 한 방울 얹는 행위는 단순히 간을 맞추는 일이 아니다. 입맛을 깨우고, 속을 달래며,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행위다. 곁찬으로 놓인 나박김치와 북어 보푸라기까지 더해지면 절제와 응축이라는 발효의 미덕이 문장처럼 또렷하게 읽힌다.

된장을 국물에 풀어낸 장온면은 묵직한 구수함이 면발 사이를 오래 머금게 하고, 청국장은 붕어찜과 만나 비린내를 눌러 재료 본연의 맛을 도드라지게 한다. 어육장을 더한 두부전골은 왕실과 반가의 상차림을 연상케 하고, 등겨장으로 버무린 맥적갈비는 고대의 조리법을 현대의 미각으로 되살린다. 천리장은 채소 화양적에 단단한 골격을 부여하고, 대구장을 활용한 해물 떡볶이는 고추장 일변도의 기억을 벗어나 해산물의 감칠맛과 만나며 또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두부장으로 완성한 두유묵과 들깨과줄은 장이 반찬과 국물에만 머무르지 않고 후식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조합은 장이 때로는 화룡점정의 조미료로, 때로는 음식의 주연으로 식탁 위에서 제 몫을 해왔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증명한다.

음식을 담은 그릇들은 단순한 전시 소품이 아니다. 도자, 목재, 유리, 금속 등 서로 다른 재질로 제작된 식기와 도구는 각기 다른 질감을 드러내면서도 조화를 잃지 않는다. 흰빛의 백자는 절제된 기품으로 음식의 깊이를 배가하고, 옹기는 발효가 요구하는 느린 시간을 시각화한다. 나무와 유기의 질감은 손끝의 기억을 환기하고, 유리는 빛을 머금어 장의 색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관람객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의 쓰임과 의미가 음식과 그릇, 도구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그릇은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서 완성되고, 그 순간 비로소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을 전시장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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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 장을 설명과 함께 전시한 공간.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계단을 올라 2층에 이르면 전시는 계절의 흐름으로 확장된다. '계절을 담은 전통 상차림'이라는 이름의 이 공간은 한국인의 식생활이 어떻게 절기와 계절에 맞춰 설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과 몸의 기운을 맞추는 생활의 지혜였다.

정월대보름 복쌈은 오곡밥과 아홉 가지 묵은 나물을 간장이나 된장으로 무쳐 김이나 취나물, 배춧잎에 싸 먹으며 한 해의 복을 기원하던 풍습을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왔다. 백경원과 손민정의 공예 식기에 담긴 복쌈은 단정하지만 빈약하지 않고, 검박하지만 단조롭지 않다. 흰색 백자의 담백한 기품과 정성스레 엮은 분죽의 따스한 질감이 어우러져 절제된 풍요를 전한다.

여름의 상추쌈 상차림은 장똑똑이, 병어감정, 보리새우볶음, 절미된장조치 같은 반찬과 약고추장, 중탕된장의 조합을 통해 찬 성질의 채소와 따뜻한 성질의 차를 맞추는 선조들의 지혜를 드러낸다. 여름철 쌈이라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 기운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생활의 기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술안주상으로 제시된 청육장 상차림은 전시의 백미다. 조선 말기의 생활 지침서 '규합총서'에 기록된 조리법을 바탕으로, 청국장에 쇠고기를 넉넉히 넣고 전복과 건해삼 같은 귀한 재료를 더해 만든 별미다. 서울의 반가에서는 이를 겨울철 차게 식혀 따뜻한 아랫목에서 즐겼다고 한다. 김동준 작가의 백자에 담긴 청육장은 흰빛의 평정 속에 발효의 농도를 숨기듯 품고 있다.

관람객은 그 앞에서 발효의 미묘한 층위를 읽어내며, 장이 단순한 '맛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음을 깨닫는다. 음식은 단품의 맛을 넘어 살림의 문장으로 읽히고, 계절과 온도, 체질과 기운을 읽어 상을 차리는 일은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생활의 기술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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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쌈 상차림 전시. / 사진 재단법인 아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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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재현된 전통 술안주상 / 사진 재단법인 아름지기
전시는 음식만으로 멈추지 않는다. 장독, 항아리, 국자, 주걱 같은 전통 도구들이 함께 놓여 있어 발효 과정과 생활 속 도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온지음 맛공방이 연구와 실험을 바탕으로 전시 기획의 한 축을 맡았고, 공예와 디자인 분야의 15명 작가가 참여했다. 그들이 제작한 식기와 도구는 전통과 현대, 실용과 조형의 경계에서 새로운 균형을 탐색한다. 실용성을 지지하면서도 조형성을 잃지 않은 식기, 손의 리듬을 기억하게 하는 조리 도구, 숨 쉬는 옹기의 물성은 장이 단순한 '맛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태도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이 전시가 끝내 던지는 질문은 '왜 지금 다시 장인가'이다. 온지음 맛공방장 정혜경은 한국 장의 기원을 콩·소금·물이라는 천혜의 재료, 사찰 음식의 전통, 곰팡이·세균·효모가 함께 작용하는 복합 발효의 지혜에서 찾는다. 음식인류학자 주영하는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의 장 담그기 풍경을 기록하며 장맛이 과학과 신앙, 기술과 윤리가 맞물려 이어져 왔음을 증언했다. 손 없는 날에 장을 담그던 풍습은 미신이 아니라 미생물과 계절을 경험적으로 학습한 지식의 언어였다. 장독대 옆에 터주신을 모시고, 새벽마다 장독의 안녕을 살피던 살림의 리듬,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라는 속담은 장문화가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건드려 왔음을 보여준다.

근대 이후 공장제 양조간장의 보급과 아파트 생활의 보편화로 가정 내 장 담그기의 장면은 줄어들었지만, 지역 공동체와 지자체가 운영하는 장 담그기 프로그램이 그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각자의 식탁에서 장의 쓰임을 오늘의 언어로 갱신하는 실천이 계속된다. 상추쌈을 계지차와 짝지어 차갑고 따뜻함의 균형을 맞추는 일, 겨울밤 차게 식힌 청육장을 백김치와 함께 내어 식감과 온도의 대비를 즐기는 일, 흰죽에 청장을 얹어 속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과거의 풍습이자 오늘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생활의 기술이다.

현장에서 마주한 장면들은 오래 남는다. 흰죽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선 관람객의 호흡, 장온면을 담은 그릇의 곡선을 따라가던 시선, 청육장 앞에서 겨울 상차림을 떠올리던 눈길이 기억 속에 선명히 각인된다.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떠오르는 것은 거대한 설명이 아니라 한 끼의 상상이다. 오늘 저녁의 식탁에서 장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각자의 부엌에서 답을 기다린다. 아름지기 홍정현 이사장은 이번 전시가 장을 다시 '살아 있는 문화'로 되살리려는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그 말은 전시장 안에서만 유효한 구호가 아니다.

장은 한 집안의 장독대에서만 익지 않는다. 도시의 아파트 주방, 동네 공유부엌, 지역문화센터의 발효 교실 같은 다양한 현장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다양성이 모여 사회의 풍요를 만든다는 믿음이야말로 유네스코가 확인한 장 문화의 힘이고, 이번 전시가 끝내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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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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