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미화하지 않고 드러낸 딜레마의 무게
암전과 정적, 작은 불빛이 켜켜이 쌓아 올린 긴장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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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대사는 꾸밈없이 직설적이다. "오늘이 며칠이야? 10월 26일, 몇 년도지?"라는 확인으로 장면은 곧장 역사적 좌표에 닻을 내리고, 관객은 '지금-여기'와 '그날-그곳'을 동시에 바라보는 상태로 끌려 들어간다. 첫 논쟁의 불씨는 명분의 언어다. "이건 테러가 아니야, 정당한 교전이야." "그렇다면 왜 전투복이 아니지? 왜 신분을 숨겼지? 헤이그 수칙에 어긋나는 덤덤탄을 왜 썼지?" 작품은 법과 윤리, 수단과 목적을 대사마다 맞붙이며 치열한 공방을 이어간다.
정체가 드러나며 긴장은 한 번 더 뒤집힌다. 침입자는 미래에서 온 늙은 아들, 안준생. 그는 아버지의 '대의'를 향해 질문의 각도를 미세하게 달리하며 파고든다. "살해가 아니라 사살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전쟁 중이니까. 그런데 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총은 전투의 규칙을 어기고 있어야 하지?"
이에 맞서 안중근은 죄목을 꼿꼿이 세운다. 명성황후 시해, 고종 폐위, 강제 조약 체결, 군대 해산, 교과서 압수, 민중 학살, 국권 강탈 등 나열되는 목록이 도덕률의 형태를 띠는 순간 무대는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판정 이전의 토론'이 된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설교하지 않고, 서로의 논거가 맞부딪히며 관객의 판단력을 자극하는 방식이다. 관객은 어느 순간 반박의 문장을 머릿속에서 미세하게 구성하고, 그 문장이 곧 무대에서 발화되는 경험을 반복한다.
이 작품의 문법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 절제가 공연의 리듬을 만든다. 장면 전환은 암전과 명암의 변화, 성냥불 하나로 대부분 해결된다. 불꽃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붙고, 불이 꺼지는 순간에는 감정의 저류가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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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의 변곡점은 조마리아의 편지가 무대 위에 소환되는 장면이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따르라." 활자로만 읽어왔던 문장이 배우의 입에서 울릴 때, 객석의 호흡이 같은 속도로 수축한다. 곧이어 안준생의 긴 독백이 뒤따른다. 임시정부의 '임시성'과 빈곤, 일자리조차 허락하지 않던 감시의 시선, 끝내 "아편"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는 대목에서 공연은 화자를 하나로 고정하지 않는다.
합창처럼 불쑥 끼어드는 다른 목소리들이 정조를 분산시키며, 관객이 특정 인물의 변명이나 선동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 "아버지는 대한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재앙이었다"라는 문장이 무심하게 꽂힐 때, 공연의 온도는 눈에 띄게 내려간다. 이 차가움은 누군가를 심판하는 냉기라기보다, '선택 이후에 남는 자들의 시간'을 억지로 직시하게 만드는 기류에 가깝다.
1939년 10월 26일, 남산 박문사 장면은 또 다른 봉우리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에게 사죄하고 손을 맞잡은 채 만세삼창을 외친다. 이 장면에서 연출은 과잉을 끝까지 경계한다. 지역 축제 같은 군중의 함성 대신, 객석을 향해 퍼지는 밝은 조명이 역광처럼 번져온다. "그날 저는 햇살이 너무 눈부셨거든요." 무대는 한 인물에게는 구원의 빛이, 다른 인물에게는 배반의 조명이 되는 역설을 조용히 체감하게 한다. 사죄의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보다, 윤리의 감각이 어떻게 서로 다른 각도로 굴절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해방에서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놀랄 만큼 빠르고 담담하다. 만세의 함성은 잠시 스쳐 지나가고, 곧바로 "대신 반으로 갈라졌다"는 대사가 이어진다. 전쟁은 군인만의 일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현실이라는 대목이 암전 사이로 건조하게 흘러간다.
이 흐름 이후 작품은 도덕적 고결함의 문제에서 벗어나 생존의 기술과 선택으로 내려온다. 살아남기 위해 총독의 양자가 되는 길을 택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타협하며, 누이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비겁한 장면들이 냉정하게 나열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이토의 아들과 맞잡은 손, 햇빛에 잠시 눈이 멀었던 순간, 그리고 결국 "사람답게 살게 됐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이 모든 순간은 '아버지의 선택'과 '아들의 선택'이라는 두 축에 매달려 흔들리고, 관객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못한 채 오래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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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앙상블은 설득보다는 지탱에 가깝다. 대사를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문장 사이의 공백을 견고하게 떠받치는 힘으로 무대를 이끈다. 여러 배우가 대사를 차례로 주고받을 때 관객은 마치 한 사람의 목소리가 여러 시점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각각의 목소리가 논지의 길을 열어주되, 무대의 중심은 정답이 아니라 균열에 있다. 감정의 볼륨을 높이는 대신 미세한 떨림과 호흡의 길이로 장면의 온도를 조절하는 선택이 돋보인다. 덕분에 무대는 마지막까지 균형을 잃지 않는다.
기술과 조형의 언어도 같은 편에 서 있다. 세트의 최소화, 암전의 길이 조절, 성냥, 총구의 각도 같은 작은 요소들이 장면을 이끈다. 조명의 명암은 논쟁의 리듬을, 음향의 얇은 떨림은 감정의 바닥을 떠받친다. 이 미니멀리즘은 장치의 절제가 아니라 무대의 리듬을 지키려는 태도다. 단어와 장면이 맨살로 드러날 때 선택의 무게는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역사극의 비장한 어투에 기대지 않고, 관객이 문장의 끝을 직접 이어붙이게 하는 여백. 그 여백이 이어져 공연의 흐름은 객석 밖 시간 속에서도 오래 지속된다.
무엇보다 '준생'이 흥미로운 점은 영웅을 쉽게 해체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태도다. 작품은 '영웅서사의 반전'을 위해 인물을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감당해야 했던 딜레마의 무게를 관객에게 전한다. "누가 기억을 말할 권리가 있는가, 그 기억은 누구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무대는 이 물음을 장면마다 되살린다. 의거의 총성과 사죄의 악수, 해방의 함성과 피난의 발자국이 차례로 겹쳐지며, 서로 다른 시간들이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 안에서 반사된다. 그 반사면에 생긴 균열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윤리와 감정, 지식과 경험을 불러내어 '당신이라면'이라는 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게 된다.
결국 하나의 문장이 남는다. "총을 쏘아야 했는가." 공연은 이 질문을 객석으로 돌려주며 오래 남는 떨림을 남긴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 마주 선 두 개의 윤리, 아버지의 대의와 아들의 생은 끝내 서로를 지우지 않고 맞서 선 채 결말에 도달한다. 그래서 '준생'의 무대는 기념의 언어보다는 성찰의 언어에 가깝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귓가에 남는 것은 단정이 아닌 물음이며, 관객은 시간이 흐른 뒤 각자의 어휘로 그 문장을 다시 써 보게 된다. 정답 대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