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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뉴욕에서 태어난 커티스 교수는 1960년대 초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일본에 유학하며 일본 정치의 인간적 측면에 매료됐다. 1971년 첫 저서 『Election Campaigning Japanese Style』(일본판 제목 『代議士の誕生』)을 펴내며 자민당 정치의 현장 구조를 생생하게 해부했다. 지방 후원회(後援, 코엔카이)가 의원을 키우고, 의원은 관료와 연결돼 예산을 가져오는 순환 구조 이른바 '일본식 정치의 논리'를 제도보다 인간관계 중심으로 설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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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는 학자이자 현장정치인들의 '조용한 브로커'이기도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등 전직 총리들과 깊은 친분을 맺었고, 도쿄의 정치권과 워싱턴 싱크탱크를 잇는 비공식 창구 역할을 했다.
1980~90년대에는 미일 양국 정책협의 과정에서 조언자로 참여하며, 워싱턴에서는 일본통(日本通)으로, 도쿄에서는 '커티스 선생'으로 불렸다. 일본어에 능통한 그는 NHK, 아사히, 닛케이 등 주요 언론의 정치 해설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고, 일본 대학에서는 '일본인보다 일본 정치를 더 아는 미국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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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에도 그는 현실적 시각을 유지한다. "양국의 외교는 감정의 정치에서 전략의 정치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역사 문제로 충돌할 때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가 흔들리는 것은 두 나라 모두의 구조적 약점"이라고 지적해왔다.
커티스의 분석이 꾸준히 주목받는 이유는, 일본 정치의 본질을 제도나 이념이 아닌 '사람과 관계'에서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정치는 정당이 아니라 개인 의원이 움직이는 정치"라고 단언했다. 이 시각은 오늘날 자민당 내 파벌정치와 장기 집권 구조를 해석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 사회는 그를 단순한 외국 학자가 아닌 '제3의 시선으로 일본을 비추는 내부자'로 받아들인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커티스는 도쿄를 자주 찾으며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존재는 여전히 일본 정치의 거울이자, 미·일·한 3국이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