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가 도시를 움직이고, 감정이 경제를 만드는 새로운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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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현 누마즈시를 연고로 한 아줄클라로 누마즈는 작은 관중 기반, 열악한 재정, 불안정한 시설 등 일본 지방 구단이 마주한 현실을 오랫동안 견뎌온 팀이다. 이 팀이 선택한 돌파구는 문화 IP를 동력으로 전환하는 것, 곧 '러브 라이브! 선샤인!!'과 손을 잡고 도시와 구단의 호흡을 맞추는 일이었다. 오늘의 러브라이브 더비가 있기까지, 누마즈는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아니라 '콘텐츠가 도시를 움직이는 구조'를 실험한 첫 현장이었다.
◇ 팬덤의 장난에서 공식 더비로
러브라이브 더비라는 이름은 애초에 공식 용어가 아니었다. 2010년대 후반, '러브라이브!'와 '러브라이브! 니지가사키 학원 스쿨 아이돌 동호회'의 배경이 도쿄에 자리하던 시절, FC도쿄 U-23과 아줄클라로 누마즈의 맞대결을 팬들이 자발적으로 러브라이브 더비라 불렀다. 팬메이드 포스터가 SNS에서 회자됐고, 관중석에는 캐릭터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구단보다 먼저 팬덤이 움직인, 말 그대로 '놀이'에 가까운 문화였다.
2020년 FC도쿄 U-23이 리그를 떠나면서 이 더비는 사라졌고, 누마즈의 존재감도 희미해졌다. 2017년 J3 진입 첫해엔 3위로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후 대부분 하위권에 머물렀고, 평균 관중 수 역시 1천 명 안팎에 머물렀다.
변화의 신호는 2023년에 왔다. '러브 라이브! 하스노소라 여학원 스쿨 아이돌 클럽'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를 무대로 등장하면서, 누마즈의 '러브 라이브! 선샤인!!'과 가나자와의 하스노소라라는 '두 세대의 러브라이브 도시'가 현실 리그 안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2024년 츠에겐 가나자와가 J2에서 강등되고, 아줄클라로 누마즈가 J3에 잔류하면서 같은 무대가 마련됐다. 팬들이 먼저 "러브라이브 더비 부활"을 외쳤고, 2월 6일 '러브 라이브!' 시리즈 공식 계정이 그 명칭을 사용한 순간 이 경기는 팬덤의 놀이터를 넘어 공식적인 문화와 스포츠의 협업 경기로 자리 잡았다.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이 리그 일정 속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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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마즈가 콘텐츠와 진짜로 결합한 순간은 축제가 아니라 위기에서 왔다. 2022년 말, 홈구장 조명탑이 J리그가 정한 최소 조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조명탑을 교체하지 못하면 J3 라이선스를 잃고, 프로 무대에서 퇴출될 위기였다. 필요한 공사비는 1억 엔, 지방 중소 구단에게는 숨이 막히는 액수였다. 시청도 도우려 했지만 코로나19로 관광이 직격탄을 맞은 뒤여서 전액 지원은 불가능했다. 구단은 운영난과 일정 차질, 라이선스 리스크를 동시에 떠안은 채 계절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 아줄클라로 누마즈는 '러브 라이브! 선샤인!!' 운영 측과 정식 파트너 계약을 체결하고 클라우드 펀딩을 열었다. 초기 두 달 동안 지역 팬과 소수 후원자의 힘으로 목표액의 절반 가까이를 모았지만, 이후 모금은 정체되었다.
구단이 꺼낸 후속 조치는 단순했다. '러브라이브 콜라보 코스'를 공식 리워드로 추가했다. 구성은 소박했다. 축구 티켓 두 장과 러브라이브 캔뱃지 두 개. 굿즈만 보면 '메리트'가 크지 않았지만, 이 코스가 열리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SNS에는 "누마즈의 하늘을 꺼뜨리지 말자"는 문장이 빠르게 퍼졌고, 팬 커뮤니티에서는 모금 현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특히 5만 엔 코스는 "과연 100명을 채울 수 있을까"라는 예상을 깨고 신청이 쇄도해, 구단이 인원 제한을 해제해야 했다. 한때 서버가 멈출 정도로 결제가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목표액을 1천만 엔 이상 초과하며 펀딩이 마감됐다. 그 결과 조명탑은 예정대로 교체되었고, 라이선스 박탈 위기는 해소됐다. 지역 언론은 "누마즈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팬들이 켠 불빛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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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아줄클라로 누마즈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구단은 팬을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함께 구단을 운영하는 시민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철학에서 현실로 이어졌다. 조명탑 교체 이후 변화는 곧바로 수치로 드러났다. J리그 공식 집계에 따르면 2023년 평균 관중 수는 약 1,300명이었다. 그러나 '러브라이브! 선샤인!!' 협업을 계기로 팬 유입이 늘어나며 2024년에는 약 1,900명으로 증가했다. 불과 1년 만에 40% 이상 증가한 수치다.
2025년 현재는 경기당 2,000명 안팎을 꾸준히 기록하며, 팀 창단 이후 가장 안정적인 관중 기반을 구축했다. 이는 단기 이벤트가 아닌 장기 구조로 이어진 사례로, 콘텐츠 협업이 구단의 지속적 관중 확보로 연결된 대표적 모델로 평가된다.
관중 수의 증가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팬이 구단의 일상에 참여하고, 지역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즉흥적인 흥행 효과를 넘어, 팬의 참여가 '지속 가능한 관객층'으로 전환된 결과였다.
이 경험을 통해 구단은 콘텐츠를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니라 도시를 움직이는 자산, 다시 말해 감정자본을 운영자본으로 전환하는 매개로 인식하게 됐다.
그 이후의 러브라이브 협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구조 설계로 옮겨갔다. 경기장 외벽엔 캐릭터 플래그가 걸렸고, 관중석 주변에는 팬 커뮤니티가 만든 현수막과 포토월이 세워졌다. 구단은 매 시즌 지역 상점가, 학교, 자영업자를 매치데이 파트너로 모집했다. 부스 운영, 체험형 이벤트 기획, 안내 동선 설계까지 시민이 맡았다. 축구가 구단의 행사가 아니라 도시의 일상으로 편입되는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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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즈시청은 러브라이브 관련 관광 소비 효과를 별도 항목으로 집계하기 시작했고, 상점가연합회는 매치데이 전후의 매출 변화를 자체적으로 공유했다. 핵심은 돈보다 관계였다. 소비가 관계 위에 쌓이자, 구단의 티켓 매출 외부에서 순환하는 경제가 커졌다.
◇ 러브라이브 더비, 도시를 연결하다
러브라이브 더비는 그 구조의 '무대'다. 2024년 2월 25일, 시즈오카 아시타카 광역 공원 다목적 경기장에서 열린 첫 러브라이브 더비에서 아줄클라로 누마즈는 츠에겐 가나자와를 3대 0으로 완파했다. 성우의 응원 영상이 하프타임을 채웠고, 경기장 밖에는 한정 굿즈를 사려는 긴 줄이 이어졌다. 팬들 사이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이긴 날"이라는 농담이 돌았지만, 현장에서 느껴진 건 다른 메시지였다. 콘텐츠가 경기장을 채우고, 경기가 도시를 하나로 묶는다는 감각이었다.
같은 해 10월 20일, 가나자와 고고카레 스타디움 원정에서도 아줄클라로 누마즈가 1대 0으로 승리하며 시즌 두 차례 맞대결을 모두 가져갔다. 하스노소라 캐스트가 현장에 합류하며 두 세대의 러브라이브 팬이 같은 구호를 외치는 장면은, 더비가 '이벤트'에서 '교류'로 변했다는 신호였다.
2025년 들어 더비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6월의 누마즈 홈경기는 러브라이브 대형 공연 일정과 겹쳤지만, J리그 공식 집계에 따르면 관중 수 7,800여 명을 기록하며 만석에 가까운 열기를 보였다. 성우 라인업이 줄어든 날에도 관중의 체류 시간과 상권 매출이 유지된 것은, 구단과 도시가 만들어낸 '경험의 구조'가 캐릭터 의존을 점차 줄여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10월 11일, 가나자와 홈에서는 츠에겐 가나자와가 3대 1로 승리했다. 누마즈전 3연패를 끊는 첫 더비 승리였다. 승패가 바뀌며 긴장감은 커졌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매 시즌 홈·원정 두 차례의 러브라이브 더비가 지속적으로 개최된다는 점이었다. 유지되는 구조 자체가 양 구단의 생존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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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비즈니스 관점에서 누마즈의 모델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감정자본의 경제화다. 러브라이브 팬덤의 애착을 클라우드 펀딩, 정기 후원, 숙박·교통·식음료 소비로 연결해 티켓 바깥에서 순환하는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둘째, IP의 플랫폼화다. 외부 IP를 단기 흥행수단으로 소비하는 대신, 구단이 주도권을 가진 '공동 플랫폼'으로 재해석했다. 행정과 상권, 학교와 자영업자가 이 플랫폼 위에서 역할을 나눴다. 셋째, 운영의 분산화다. 매치데이의 상당 부분을 시민 파트너가 운영하면서 비용 부담을 낮추고 참여의 밀도를 높였다. 넷째, 정체성의 유지다. 캐릭터가 전면에 서는 날에도 경기의 리듬, 유소년 육성, 지역 학교 클리닉, 사회공헌 프로그램 등 축구의 본류가 우선하도록 운영 원칙을 둔 점이 장기 지속성을 담보했다. 'IP는 포장, 팀은 본질'이라는 구분이 분명할수록 팬 피로는 줄고, 구단 신뢰는 높아진다.
이 모델은 지방 스포츠 산업의 오래된 질문에도 답을 준다. '작은 팀이 어떻게 살아남는가?' 아줄클라로 누마즈가 제시한 해답은 규모가 아니라 연결의 밀도다. 대기업 스폰서 없이도 도시의 서사를 품으면 팀은 버틴다. 그 서사를 붙잡는 도구가 누마즈에선 '러브 라이브! 선샤인!!'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IP가 아니라 관계다. 팬은 소비자에서 공동 운영자로 이동했고, 상인은 단순 판매자가 아니라 구단의 파트너가 됐다. 행정은 지원 기관에서 생태계 설계자로 변했다. 이 연결망이 구단의 재무제표에는 전부 드러나지 않지만, 경기장 밖의 길고 조용한 줄과 높은 객실 점유율, 이벤트 다음 날에도 이어지는 골목의 발걸음이 그 증거다.
물론 경계도 있다. 첫째, IP 의존의 피로를 경계해야 한다. 같은 형식의 반복은 감정을 소모시킨다. 아줄클라로 누마즈가 시즌마다 파트너 구성을 순환하고, 사회공헌 테마를 바꾸며, 팬 참여 포맷을 변주하는 이유다. 둘째, 투명한 환류가 필요하다. 팬과 도시가 만든 자금과 에너지가 시설 개선과 유소년, 선수단 환경에 어떻게 쓰이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신뢰가 쌓인다. 셋째, 경기의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서사는 결국 90분의 밀도로 귀결된다. 경기력은 콘텐츠가 아닌 축구가 이야기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결국 러브라이브 더비의 진짜 의미는 '두 번의 콜라보 경기'가 아니라, 도시, 구단, 콘텐츠가 매해 호흡을 맞추는 구조에 있다. 누마즈역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 누군가는 '러브 라이브! 선샤인!!'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누군가는 선수 명단을 훑는다. 상점가의 사장님은 "오늘은 아줄클라로 누마즈가 이겨야 해요"라고 말하고, 아이는 하늘색 타월을 흔든다.
이 모든 장면의 합이 곧 아줄클라로 누마즈라는 구단의 심장 박동이다. 조명탑의 불빛은 단지 경기장을 비추는 조도가 아니라, 도시가 스스로를 비추는 방법이다.
스포츠는 더 이상 흥행 산업만이 아니다. 이제 스포츠는 공유 산업이다. 감정을 공유하고, 공간을 공유하며, 일상을 공유한다. 아줄클라로 누마즈는 그 정의를 살아 있는 사례로 증명했다. 러브라이브 더비의 깃발 아래서 누마즈는 캐릭터의 도시를 넘어 '축구가 살아 있는 도시'로 재탄생했다. 작은 팀이지만, 누마즈는 도시를 살리는 법을 누구보다 먼저 배웠다. 그래서 오늘도 그 하늘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