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역동적 성장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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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래 성장은 불안하다. 1960년부터 2000년까지 실질 국민소득의 연평균 성장률은 9%로 세계 최고였다. 그러나 지금은 2% 안팎으로 떨어졌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고 노령인구의 비율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성장률이 1% 이하로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의 성장률이나 인구 구조가 한국 경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의 궤도는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 '혁신이 주도하는 성장'을 주제로 한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한국 경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2025년 노벨경제학상은 필리프 아기옹, 피터 하윗, 조엘 모키어 3명의 학자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이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지속적인 성장을 이끄는지를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성장은 자본이나 노동 투입이 아니라 혁신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아기옹과 하윗은 1992년 논문에서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개념을 수학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기업이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생산 공정을 개선하고, 더 나은 품질의 신제품을 내놓는 과정에서 기존 기술과 상품이 점차 도태되는 현상을 정교하게 분석했다. 이러한 창조와 파괴의 순환은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장기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동력이다. 이들의 연구는 지속 성장이 단순한 자본 축적이 아니라 혁신을 유도하는 제도적 환경과 경쟁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업의 기술 투자, 이를 촉진하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 그리고 혁신을 뒷받침하는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경제는 역동성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어는 혁신의 근원을 문화에서 찾았다. 그는 "왜 어떤 사회는 지속적으로 혁신을 이루는 반면, 다른 사회는 정체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를 단순한 기계나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게 만든 문화적 변화에서 설명했다. 그가 정의한 문화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신념과 가치, 선호로서 사회적으로 전달되고 공유되는 것"이다. 16~18세기 유럽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이러한 변화의 전환점이었다. 자연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과학적 발견이 기술적 응용으로 이어지고, 지식이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모키어의 연구는 경제 성장은 기술 자체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태도와 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의 한국 경제에도 깊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와 수출을 통해 '따라잡기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자본과 노동 투입만으로 버틸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인프라와 ICT 기술력, 그리고 반도체·자동차 등 첨단 산업을 주도하는 대기업,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혁신 성장의 길에서는 기술 선도국에 뒤처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제약은 분명하다. 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와 높은 진입 장벽은 신생 기업과 벤처의 도전을 어렵게 한다. 혁신보다 안전한 모방을 택하는 기업문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실험되고 사업화될 수 있는 혁신 생태계는 여전히 미흡하다. 정부의 규제는 복잡하고, 새로운 산업에 대한 법적 기반은 더디다. 혁신의 싹이 트기 전에 문화와 제도의 벽에 막히는 셈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성장을 되살리려면 혁신이 핵심이다. 이제 한국은 진정한 '혁신 주도 성장'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방향이 중요하다.
첫째, 혁신을 촉진하는 제도와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기업 간 공정 경쟁이 보장되고, 신기술과 신생 기업이 쉽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특정 산업을 선택해 지원하기보다, 창업과 실패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창의적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암기보다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탐구하는 능력과 토론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입시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협업·실험·실패를 통해 배우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학·기업·연구기관 간의 개방적 협력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실용화될 때 혁신의 토양이 마련된다.
셋째, 사회적 신뢰와 개방의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뿌리내리려면 이질적 의견을 포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사회적 자본이 낮고, 불신과 분열이 커지면 혁신의 동력은 약해진다. 신뢰와 협력의 문화가 강할수록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
성장은 단순한 경제 목표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삶의 조건이다. 저성장의 궤도에서 벗어나려면,"한국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투자와 규제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와 제도를 세워야 한다. 낡은 것을 과감히 버릴 때, 한국 경제는 다시 도약할 수 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종화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 미국 컬럼비아 대학·하버드 대학·호주국립대학 초빙교수, 고려대 정경대학장과 정책대학원장, 한국경제학회장, 한국국제경제학회장을 역임했다. 학술공적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인촌상, 다산경제학상, 매경이코노미스트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