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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웃음이 폭주한 자리, 묵직한 진심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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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0. 30. 14:03

연극 '과속스캔들' 리뷰
웃음 뒤에 남은 진심, 그 미묘한 온기의 무대
빠른 호흡 속에서도 끝내 사람을 향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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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과속스캔들' 공연 장면 / 사진 나인진엔터테인먼트
오픈런 공연 '과속스캔들'은 빠른 호흡으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면서도, 그 안에 감정의 잔향을 남긴다. 첫 장면이 시작되면 무대는 곧 소동의 한가운데가 된다. 문이 열리고, 전화벨이 울리며, 대사가 겹쳐 들리는 순간 관객은 혼란 속으로 빨려든다. 복귀를 앞둔 배우의 대기실에 급작스레 옛 연인과 사라졌던 아이, 특종을 노리는 기자가 차례로 찾아들며 대사는 폭죽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속도는 웃음의 속도가 아니라 관계가 무너지고 복원되는 속도다. 거짓과 진심,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인간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간극을 재치 있게 그려내며 '관계의 복귀'를 향해 달려간다.

무대는 단 한 곳, 복귀를 앞둔 배우의 대기실이다. 대사와 소품이 만들어내는 현실감은 객석과의 거리를 좁힌다. 오랜 공백을 깨고 복귀를 준비하는 배우 재준은 연극 '런투패밀리'의 막이 오르기 직전 마지막 리허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앞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과거의 연인 혜선이 19년 만에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곧이어 혜선의 아들 맥스가 나타난다. 이 소동극은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폭발한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진심과 거짓이 뒤섞이며, 무대는 복귀의 공간에서 혼란의 전장으로 바뀐다.

'과속스캔들'의 가장 큰 미덕은 속도에 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단순한 빠름이 아니라 정확한 타이밍의 합이다.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각자의 대사보다 그 사이의 간격에서 완성된다. 웃음은 대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말과 말이 부딪히는 찰나, 누군가의 숨이 멎는 순간, 문이 열리고 닫히는 타이밍에서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 코미디의 구조는 연출과 배우가 얼마나 세밀하게 계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순간의 정적이 전체 장면의 박자를 바꾸고, 그 정적은 코미디의 리듬을 조절하는 장치가 된다. 한 박자 빠른 대사는 단순한 농담으로 흘러가지만, 한 박자 늦은 대사는 진심으로 남는다. '과속스캔들'은 이 리듬의 차이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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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과속스캔들' 공연 장면 / 사진 나인진엔터테인먼트
무대 위 인물들은 모두 불안의 얼굴을 하고 있다. 복귀를 앞둔 배우, 다시 나타난 첫사랑, 특종을 쫓는 기자, 그리고 재벌가 약혼녀까지. 그들은 각자의 사정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이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작품은 이 복잡한 구조를 무겁게 다루지 않는다. 웃음으로 밀어붙인다. 관객은 처음에는 상황 자체에 웃다가, 점차 그 웃음 속에 스며든 진심을 느낀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수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의 연쇄가 '과속스캔들'의 서사다. 연극은 코미디의 형태로 이 진실을 보여준다. 웃음의 파동이 커질수록, 그 속에 숨어 있는 외로움은 선명해진다.

배우들의 호흡은 공연의 생명력이다. 좁은 공간 안에서 여섯 명의 인물이 동시에 움직이는 장면은 혼란스럽지만 결코 어수선하지 않다. 동선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물건을 건네는 타이밍,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이 모두 하나의 박자처럼 작동한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마다 배우는 서로의 눈을 확인하고, 객석의 반응에 따라 리듬을 미세하게 조정한다. 그것은 단순히 연기라기보다 일종의 합주에 가깝다. 말과 몸이 동시에 연주되는 연극, 바로 그것이 '과속스캔들'이 만들어내는 정밀한 코미디의 형태다.

연출의 힘은 소극장의 제약을 무기로 바꿨다는 데 있다. 작은 무대는 관객을 멀리 두지 않는다. 대사가 조금만 높아도 객석이 흔들리고, 배우의 숨소리 하나까지 전달된다. 관객은 그 공간의 일부가 된다. 이 밀착된 구조 속에서 코미디의 박자가 살아난다. 무대는 단순하지만 조명과 음향, 그리고 배우의 동선이 얽히며 리듬을 유지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 하나, 전화벨의 울림 하나가 장면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빠른 장면 전환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이 기술적 완성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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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과속스캔들' 공연 장면 / 사진 나인진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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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과속스캔들' 공연 장면 / 사진 나인진엔터테인먼트
이 연극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지점은 '복귀'라는 주제를 코미디의 언어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재준의 복귀는 단순히 배우로서의 귀환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시 자신을 믿는 과정이다. 웃음은 그 복귀의 언어다.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망가진 관계를 다시 붙잡는 용기,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용기. 작품은 그 용기를 소동과 웃음 속에 숨겨 놓았다. 복귀의 대기실은 결국 삶의 무대이며, 관객 또한 그 무대의 일부가 된다.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웃음의 밀도는 점점 줄어든다. 대신 침묵이 늘어나고, 인물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다. 재준이 혜선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서는 순간, 객석은 함께 숨을 멈춘다. 그 침묵은 후회의 시간이자 화해의 시간이다. 관객은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이 지나온 관계의 풍경을 떠올린다. 우리가 너무 빠르게 오해하고 너무 늦게 사과했던 장면들이 겹쳐 보인다. 웃음은 어느새 감정의 언어로 변해 있다.

오픈런 공연으로서 '과속스캔들'은 회차마다 다른 호흡을 품는다. 배우가 바뀌고 관객의 구성에 따라 장면의 박자와 리듬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코미디의 힘은 진심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 진심이 지켜지기 때문에, 어떤 조합이든 공연은 살아 움직인다. 이날 공연에서도 객석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젊은 관객은 대사와 리듬에, 중장년층은 관계의 아이러니에 웃음을 터뜨렸다. 세대가 다르지만, 웃음의 포인트는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인간의 허점을 인정할 때 생기는 그 미묘한 공감의 순간이다.

공연의 마지막은 의외로 조용하다. 모든 오해가 풀린 뒤에도 남는 것은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신 서로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느린 대화다. 화려한 마무리 대신 남겨진 어색함과 멈춤이 이 연극의 여운을 완성한다. 배우들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객석을 바라본다. 웃고 떠들던 시간이 끝나고 난 뒤, 극장은 조용해지지만 마음속에는 이상한 따뜻함이 남는다. 그것은 미처 하지 못한 사과, 혹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형태를 닮았다.

'과속스캔들'은 결국 인간의 진심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빠르게 살아가는 시대에, 이 연극은 잠시 브레이크를 밟게 한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복귀다. 웃음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관계의 복원력이다.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 웃음이 얼마나 인간적인 언어인지를 다시 배운다. 그리고 극장을 나서며 깨닫는다. 웃음이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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