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 프레임과 일회적 소모로 분노 유발
정치, 사이비언론은 이미 분노 상품화가 일반화
|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약물 복용 등이 밝혀져 메달 박탈은 물론 영구 제명까지 당하는 일이 적지 않음에도 이 같은 국제대회가 열린다는 자체가 놀랍다. 세계적 투자펀드와 사업가, 유명인사들이 후원하며,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메달리스트들이 경제적 이유 등으로 뛰어드는 걸 보면 돈이 되는 모양이다.
'스테로이드 올림픽' 참가선수들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활용할 약물은 그들에게 분노 유발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공격성과 충동성 같은 정서적 압박, 보상 기대 등과 어우러진 분노감은 힘이고 에너지 원천이며 목표를 위한 최적화 도구로 작동하게 된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멀리'만 최대한 충족시키면 된다. 선수들의 약물 복용과 관련한 거의 모든 연구 결과는 그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매년 12월에 올해의 단어를 뽑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에는 '분노 미끼(rage bait)'를, 2024년에는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었다. 영어 사용 지역의 뉴스 기사로부터 추출한 단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그해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흐름이나 변화를 '대표'할 수 있는 (합성)단어 하나를 콕 집어낸다.
옥스퍼드 사전은 지난해와 올해의 두 단어가 합쳐지면 분노를 유발한다고 설명했다. 분노는 참여를 촉발하고, 알고리즘이 이를 증폭시키며, 지속적 노출로 악순환에 들어서면, 사고방식과 행동이 변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핸스드 게임은 약물로 인한 각성효과로 분노를 적절히 유발, 충동성과 공격성을 증폭시켜 보다 흥미로운 결과를 유도한다. 노골적인 분노의 상품화다. 물론 모든 약물 복용은 의료적 관리하에 진행된다고 대회 측은 해명을 했다. '의료적 관리'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세계도핑방지기구(WADA)는 지난 1일 부산에서 열린 총회에서 금지약물을 권장하는 이 대회가 선수들에게 너무 위험해 용납할 수 없는 대회라고 강력히 반대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분노의 상품화는 곳곳에서 발현한다. 정의로운 분노는 공분으로, 공분은 공의로 흘러간다. 흔히 말하는 긍정적 의미로서의 개혁의 원동력이다. 사회변혁의 기저에는 늘 그런 류의 공분과 공의가 있었다. 돈과 권력을 목표로 치닫는 상품과 도구로서의 분노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정치 영역에서 분노의 상품화를 목도해 왔다.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분노의 상품화는 일반화됐다. 이미 혐오투표, 증오투표는 낯선 용어가 아니다. 최근 몇 차례 대선에서의 정권교체는 분노의 힘을 빌려 이뤄낸 결과다. 정치 활동에서는 비아냥, 맥락 없는 조어(造語), 팬덤을 의식한 어거지 강성 주장이 어지러이 눈과 귀를 끌어당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조악한 일회용 상품을 길거리에서 내다 팔고 다른 동네로 재빨리 가듯, 즉각적 소모를 위해 분노 상품을 획획 내던지는 것 같다. 일부 셀렙들은 SNS를 통해 현학적 표현을 내세우지만, 교묘히 분노 자극 프레임을 제공함으로써 끼리끼리의 찰나적 환호에 기여한다.
우리 정치만 그런 건 아니다. 분노가 갖는 '음험하고 교묘한 힘'을 상품화해 정치, 경제, 문화적 이익을 얻는 건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 대선에서 두 차례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정치인으로서 조지 밈다니의 깜짝 부상과 뉴욕시장 당선도 분노를 자극한 결과다. 유럽 각국의 선거나 정치 사회적 이슈 대결 과정, 지금은 영국인 과반이 후회하고 경제에도 악영향 평가를 받는 브렉시트 결정(2016년) 과정 등에서 밑바닥에 깔린 분노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언론(물론 자칭 언론의 비중이 훨씬 크긴 하다)도 의도했든 아니든 분노의 상품화에 기여한다. 사이비 언론은 겉으로는 우아하게 비판 감시의 기능과 알권리로 포장하지만,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스테로이드 올림픽'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미국 최고의 부자인 팔란티어의 공동창업자 피터 틸,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 등 굵직한 투자자의 지원을 받고 있다. 정말 돈과 권력이 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스테로이드 올림픽, 선동 정치, 돈벌이 SNS 등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분노의 상품화, 그 끝은 어디인가. 스테로이드 올림픽은 대놓고 분노 상품화를 지렛대 삼아 돈과 권력, 값싼 명예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노골적인 분노의 상품화 흐름, 사회가 더 이상 이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무서운 경고음 아닌가.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명호(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