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존 F. 케네디(JFK): 신선한 바람(fresh winds)의 리더십(하)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122101001124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5. 12. 21. 18:03

202512070100062440003575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1950년대만 해도 텔레비전은 비교적 소수의 부유한 가정들만 소유한 신제품이었다. 그러나 1960년에는 10가구 중 9가구가 텔레비전을 갖고 있었다. 당시 시작된 첫 텔레비전 토론에서 케네디는 미국이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그의 친숙한 촉구로 시작했다. 그는 미국이 소련에 뒤처지고 있으며 아이젠하워 시대의 기록이 새로운 리더십 하에서 향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시대가 미국에 기록적 경제성장을 가져다주었다고 방어하면서 대응했다. 비록 닉슨은 토론에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지만, 텔레비전의 이미지 전쟁에서 졌다. 이 토론 후 케네디는 플로리다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쿠바인들이 자유를 다시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라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촉구했다.

마지막 토론에서 케네디는 닉슨을 난감한 입장으로 몰았다. 닉슨 부통령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타도하기 위해 쿠바의 망명자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쿠바에 상륙시킬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케네디는 최종 선거 결과에서 투표자 투표에서 11만8574 표차로, 그리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303표 대 219표라는 근소한 표차로 닉슨에게 승리했다. 존 F. 케네디는 제35대 대통령이 되었고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 그리고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젊은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61년 1월 20일,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연설을 했다. 그것은 미국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 취임 연설은 외교정책에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정책에도 함의를 갖고 있었다. 국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국민적 단결이 긴요했다. 분열하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케네디 대통령은 국민적 단결을 호소한 후에 대담하게 미국의 국제적 의무를 주장했다. "우리에게 호의적이든 비호의적이든 모든 나라들에 알린다. 우리는 자유와 생존의 성공을 위해서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것이며, 어떤 짐도 질 것이며, 어떤 어려움에도 대처할 것이고, 그리고 어떤 우방도 지원하고 어떤 적에도 반대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약속한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그러면서 케네디는 소련과의 투쟁은 전시의 특징인 단기적 희생이 아니라 장기적인 희생을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장기적인 투쟁은 폭정, 빈곤 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항하여 수행될 것이다.

미국의 남부 국경선에선 피델 카스트로의 새 공산주의 정권이 미국에 도전하는 반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초강대국들이 신생 독립국가들의 충성과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했으며,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은 비공산 국가지만 부패한 월남 정부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해소되지 않은 베를린 문제가 미·소 관계에서 주된 골칫거리였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에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후루시초프(Nikita Khrushchev)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가들은 소련으로서는 공산주의를 발전시킬 기회를 대변한다는 "민족해방"의 연설을 했었다. 케네디가 취임한 뒤 후루시초프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에게 케네디를 만나고 싶다고 시사했다. 그 결과 양측은 1961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빈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서 그의 첫 외교정책의 위기를 맞았다. 전임 행정부에서 미(美) 정보국은 과테말라에서 자신들의 조국 땅을 침공하기 위해 망명한 쿠바인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개발했다. 후루시초프는 쿠바에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보냈다. 미 정보국은 쿠바의 침공이 피델 카스트로 지배의 종식을 가져오지는 않아도 쿠바 전역에서 공적 무질서를 가져오는 데 충분할 것이고 그러면 이것이 카스트로의 축출을 가져올 것이라고 가정했다. 케네디는 그 계획을 승인했지만, 그 시도에서 미군은 전혀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그렇게 했다. 1400명의 망명한 쿠바인들이 착륙했을 때 카스트로는 소련제 탱크로 침략자들을 3일 만에 분쇄했다. 실망스러운 결과는 세계 무대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미국에 굴욕적이었다. 케네디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피그만(the Bay of Pigs) 사건은 그가 소련 지도자 후루시초프를 만나기 단지 몇 달 전에 발생했다.

케네디는 빈으로 가는 길에 프랑스에 잠시 들러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협의했다. 후르시초프는 케네디의 결의를 시험할 목적으로 빈에 도착했다. 그는 케네디가 피그만 사건의 낭패 때 행동했던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상회담 첫날 케네디 대통령은 후루시초프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이념적 토론에 들어가는 실수를 범했다. 케네디는 기존의 힘의 균형이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후루시초프를 화나게 했다. 후루시초프는 움찔했고 케네디의 제안은 갈등에 대한 처방이라고 답변했다. 케네디는 자기가 어설프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고 후루시초프가 자기를 소년처럼 취급했다고 말했다. 두 지도자가 다음 날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의 대화는 골치 아픈 동독(East Germany) 내 베를린의 지위 문제에 집중되었다. 후루시초프는 대담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을 때가 왔다면서 미국이 무엇을 하든 1961년 말까지 동독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동독이 서베를린을 장악해도 미국과 서방은 이것을 막을 힘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루시초프의 이런 속내의 노출은 케네디에게 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려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후루시초프는 대결 대신에 동베를린으로 부터 서베를린을 차단하는 장벽을 건설하기로 했다. 케네디는 소련의 행동이 베를린의 지위에 대한 1945년에 도달한 합의를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벽을 세울 소련의 권리에 도전하지 않았다. 베를린 문제에서 성공하자 후루시초프는 케네디가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정부는 1962년 7~8월에 쿠바에서 소련인들과 장비의 이동을 알아차렸다. 8월 10일 정보국장은 대통령에게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하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8월 29일 정보국장은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소련의 의도에 대한 두려움을 재차 설명했지만 대통령을 설득할 수 없었다. 정보국은 피그만 사건에서 완전히 틀려 의심할 여지 없이 케네디는 정보국의 정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은 소련에 쿠바에서 핵 기지의 건설을 시작할 시간을 주었다. 케네디가 쿠바에서 소련의 위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소련 리더십은 그가 서반구에서 핵미사일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용의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케네디가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건설에 대한 그의 대응에서 비효율적이었고 또 재앙적 빈 정상회담을 견디어 냈기 때문이다.

10월 20일 국가안보회의가 소집되고 대통령의 주도하에 쿠바의 봉쇄를 결정하고, 소련이 쿠바로부터 모든 공격 미사일들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기로 하고, 그리고 만일 후루시초프가 이 요구를 거절한다면 공습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의 17분짜리 연설은 경악스러웠다. 거의 1억명의 미국인들이 들었다. 케네디는 국민에게 소련이 여러 미국의 도시들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로 쿠바에 핵 공격 능력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그는 해군이 쿠바를 완전히 격리시킬 것이며 어떤 공격 미사일도 막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일 소련인들이 쿠바에서 미국에 대해 어떤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그는 소련에 대해 완전한 보복 대응을 명령할 것이라면서 만일 소련이 서베를린을 위협한다면 그곳을 방어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소련인들이 모든 공격용 무기들을 제거하고 쿠바에서 그들의 미사일 기지를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해군 봉쇄는 10월 24일에 시작했다. 첫날 긴장은 높았지만, 그러나 봉쇄는 완전한 작전에 들어갔고 사실상 미국의 전(全) 핵(核)병기고가 무장되고 소련을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 10월 24일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루시초프는 소련의 선박들이 미국의 해군 봉쇄를 저항할 것이라고 시사했다. 이 경고에 대한 케네디의 대응과 그의 위기를 다루는 솜씨는 일반적으로 수년 동안 논의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케네디의 "최고의 순간(the finest hour)"이라고 불렀다.

10월 27일 마침내 후루시초프가 케네디에게 직접 접촉하여 다소간 케네디가 수용한 제안을 전달했다. 그것은 소련이 쿠바에서 소련의 미사일들을 제거하는 대가로 미국이 튀르키예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다만 튀르키예로부터 미국 미사일의 제거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양해를 얻어냈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평화는 공포의 아들이었다. 케네디는 핵(核)시대에 계몽된 지도자로 등장했다. 1963년 아메리칸대학교(American University)에서 행한 졸업식 연설에서 그는 어떤 사회도 괴멸되어야 할 만큼 악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의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과 군비통제에 대한 합의를 서명한 최초의 미국 행정부가 되었다. 1963년 핵실험 금지 조약은 미·소 관계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양국은 대기권에서 핵실험을 종식시키기로 서약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여름에 유럽으로 기억할 만한 여행을 했다. 서베를린에서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연설 가운데 하나를 했다.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와 서독 수상 콘래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를 동반한 자리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모든 자유인들은 베를린의 시민들이다." 그러므로 자유인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말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자랑스럽게 외쳤다. 청중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여전히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유럽에 케네디는 젊고 활기찬 미국을 투사했으며 동시에 지구적으로 존 F. 케네디는 미국의 새로운 신선한 리더십의 정치가로 등장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역사에서 신화적 인물로 승화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1000일(A Thousand Days)'이라는 전기를 썼던 저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신저(Arthur Schlesinger)는 "케네디 대통령은 아주 많은 것을 성취했다. 그는 첫 세대의 미국 지도자들이 내다보았던, 즉 젊고, 용감하며, 문명화되고, 합리적이고, 즐겁고, 강인하고, 탐구하고, 역사의 흥분과 잠재력에서 의기양양한 공화정을 재수립했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영웅적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믿는 바로 그 세상에 대한 밝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지속적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끝)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