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생존현안, 국내정치용 취급 안돼
힘·전략 없이 식탁에 앉는다면 먹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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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워싱턴 정치에서 쓰이는 미국의 오래된 관용적 표현이다. 2024년 2월 조 바이든 정권 당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뮌헨 안보회의 토론에서 "국제체제에서 식탁에 앉지 못하면 당신은 메뉴판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 패널은 독일, 인도 외교장관 등이었으며 사회자가 '미중 긴장이 더 큰 분열을 초래한다'라는 지적에 대한 대답이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연대해야만(식탁에 같이 앉아야만) 중국 등에 의해 국익이 침해당하는(메뉴 신세가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편에 서라는 줄 세우기다. 2022년 워싱턴의 미·중 관계 포럼에서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은 표현을 썼지만,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카니는 강대국들에 맞서 중견국 연대를, 블링컨은 힘의 우위를 강조하며 우리 편에 서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나섰던 진보 진영의 아이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도 이 말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녀에게는 계급 투쟁의 구호였다. 거대 기업과 로비스트들이 장악한 정치(식탁)에 서민과 노동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이익을 위한 희생양(메뉴)이 된다며 정치 참여를 독려했다.
'식탁과 메뉴'는 이렇게 각각의 정치적 활용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쓰이지만,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다. 힘이 없으면 먹힌다는 냉혹한 국제질서다. 현대사회만 그런가. 항우 측의 유방 살해 음모를 그렸던 홍문연(鴻門宴) 장면은 삼국지에서도 유명하다. 술을 먹던 중 잠시 뒷간에 가겠다는 핑계로 유방이 연회장을 나왔다가 바로 도망가지 않고 항우에게 다시 인사를 하겠다 했다. 그러자 번쾌가 말한다. '상대방은 칼과 도마요, 우리는 도마 위 생선과 고기(인위도조 아위어육 人爲刀俎 我爲魚肉)'라고. 그러자 바로 달아났고, 훗날 한(漢) 나라를 세운다. 워싱턴 정치의 '식탁과 메뉴'와 정확히 일치한다.
기원전 5세기, 이른바 '멜로스 회담'. 강대국 아테네가 중립국 멜로스를 침공하기 직전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겪는다"는 항복 권유는 국제정치의 영원한 규칙이다. 멜로스는 정의와 도덕을 주장했지만, 아테네는 그들을 도륙하고 멸망시켰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기록한다. 힘과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도덕적 호소는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개인정보 유출로 촉발된 '쿠팡 사태'로 외국인 대표를 국회에 불러놓고 호통만 쳤던 민주당은 '쿠팡 바로잡기 TF'를 슬그머니 보류했다. 그동안 J.D. 밴스 부통령과 미국 의원들이 쿠팡을 거론했다. 미국은 한국의 디지털 플랫폼 독과점규제법안 추진을 자국의 빅테크 기업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의도적인 한미통상 갈등 요소 만들기다.
안보 분야에선 '2026 국방전략(NDS)'을 통해 '북한 대응은 한국이 주도하고 미국은 제한적이고 결정적 지원을 한다'는 개념을 내보였다. 아마도 방위 비용의 대폭 전가,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 시도가 뒤를 이을 것이다. 이미 주일미군 사령관의 계급 상향 조정과 맞물려 점차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갑자기 관세를 25%로 올린다는 경고를 발표했다. 청와대가 즉각 회의를 소집하고 장관을 미국에 보낼 정도로 큰 사안이다. 미국은 지난 8월 한미 정상회담의 팩트시트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청와대 대변인이 공동성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잘됐다는 그 회담이다.
미국은 차근차근 한국의 약한 고리로 보이는 부분을 정확히 꼬집어 동시다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쿠팡의 사업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강력한 수단으로 개선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게 도덕적 청문회, 감성적 흥분으로 될 일인가. 미국은 대통령, 부통령, 의회와 관련 부처가 나서 개별 기업과 주요 산업의 이익을 국가 핵심 이익으로 치환시켜 힘을 투사하고 있다. 냉혹한 힘의 투사를 여론과 감성에 대한 호소형 수준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가 생존이 걸린 현안들을 국내 정치용으로 저렴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대응이 맞다면 쿠팡 사태나 여러 압박에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미 조용해졌다.
냉엄한 국제관계를 국내 정치에서 값싸게 소비하는 행태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한국에는 작금의 국제질서가 필요로 하는 공급망 또는 가치 사슬에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국내 여론과 국내 정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이런 부분에 정교하게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끝은 명확하다. 힘을 기르고 전략적으로 식탁에 앉지 않는 한, 강대국들 만찬에 오를 가장 먹음직스러운 메뉴가 될 뿐이다. 섬뜩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진짜 현실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명호(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