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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용궁리 고택에서부터 제주도 대정현의 유배길을 거쳐 과천의 초당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생애는 숙연하기 그지없다. 예산에도, 제주에도 추사를 기념하는 곳이 있지만 그냥 가벼운 구경거리일 뿐 '시대의 천재'에 대한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2013년, 추사박물관의 개관으로 추사의 행로는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야외전시장과 지하 1층, 지상 2층의 박물관은 복원된 과지초당과 추사의 학예와 생애, 후지츠카 기증실 등으로 이루어져 꼼꼼하게 추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의 삶이 잘 정리되어 있고, 그의 방대한 학문과 예술세계가 주제별로 나타나 있어 여길 들르지 않으면 추사를 안다 하기 어렵고, 다녀갔다면 추사를 모를 수 없는 곳이다.
추사박물관에는 추사를 알게 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많았지만, 나는 두 가지를 권하고 싶다. 먼저, 제주 유배시절에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논어(論語)의 구절을 되새겨주는 그 세한도의 여백과 메마른 붓질로 추사의 당시 마음을 느껴보라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인장과 낙관을 모아 놓은 공간에선 그 뜻을 새겨두라 권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홍두(紅豆: 상사(相思)의 정을 간직한 사람),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잘못됨을 따지지 않는다), 언정(言情: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다)이라는 인장에서 눈길을 떼기 어려울 것이다.
한 위대한 천재의 생애를 다양하게 알려주는 박물관, 다시 찾아와도 새로운 추사를 알려 주는 박물관으로 기억하고 싶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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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의 화재로 소실된 은해사를 중건하면서 혼허 스님은 추사에게 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은해사 중건기'(1862)에 주지 혼허 스님이 "대웅전, 보화루, 불광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밝혀 놓았으며, '은해사연혁변'(1879)에서 당시 영천군수 이학래는 "문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의 일로향각(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라고 했다.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을 이고 있는 전각의 내력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추사의 글씨가 이곳에서 복각되어 도처에 나눠진 걸 보면 그 원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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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열 자 유마의 방을 들여다보니 / 능히 900만 보살을 수용하고 / 3만2000개의 법석을 / 모두 들이고도 비좁지 않으며 / 또한 능히 발우에 담긴 밥을 나누어서라도 /한량없는 대중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도다'
어느 미술사학자가 '무르익을 대로 익어 필획의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 없다'고 평한 글씨들이 은해사에 모여 있다. 특히 은해사의 현판은 추사체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1848년 12월, 9년간의 제주도 귀양길에서 풀려나 돌아왔지만 2년여 뒤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길에 오르는데, 그 짧은 서울 생활 동안 쓴 작품이 은해사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추사의 글씨는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현장의 감흥까지 느낄 수는 없지만, 기대감은 늘 식지 않는다. 분명 영천 은해사는 추사의 글씨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스스로 뜻을 새기게 하는 체험도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생각들이 은해사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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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이 지났다. 추사의 또 다른 호, 춘원(春園)이 떠올려진다. 봄날의 정원에 나서는 호기심으로 그의 글씨를 찾아 나서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