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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미술, 다시 읽다…미술관이 넓히는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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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6. 08. 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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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회고전부터 동시대 실험까지…여성 작가 조명 잇따라
기억·생태·사회 시스템 등 시대의 질문을 각자의 언어로 풀어내
함양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 2026,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사진 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함양아의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올해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들의 전시가 유난히 눈에 띈다. 상반기 김윤신·방혜자 등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을 재조명하는 회고전이 이어진 데 이어 하반기에도 우순옥·함양아·박혜수·구정아 등 서로 다른 세대의 작가들이 주요 미술관에서 관객을 만난다. 과거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작가의 작업을 복원하는 동시에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지형을 살펴보려는 움직임이다.

주목할 점은 이들의 작업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억과 존재, 생태와 돌봄, 기술과 인간, 권력과 사회 시스템 등 동시대의 복잡한 문제를 각자의 언어로 탐구하며 미술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성곡미술관에서는 우순옥(1958~2023)의 회고전 '예술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가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초기작부터 작고 직전 작품까지 회화·드로잉·설치·영상 등을 망라해 작가가 평생 탐구한 존재와 기억,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되짚는다. 녹슨 철판과 오래된 의자, 옷 등 일상의 사물에 쌓인 시간과 기억을 작품으로 끌어들인 우순옥의 작업은 한국 개념미술의 독자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우순옥의 사물의 질서 성곡미술관
우순옥의 '사물의 질서'. /성곡미술관
아트선재센터에서는 함양아 개인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가 열리고 있다. 2018년 시작한 장기 리서치 프로젝트의 궤적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로, 신작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은 금융 자본주의와 환경 위기, 팬데믹 등 복잡하게 얽힌 세계의 구조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을 다룬다. 자연물의 미세한 변화와 시간성을 탐구했던 초기 작업에서 출발해 이동성과 정체성, 권력과 사회 시스템으로 관심을 확장해 온 작가의 작업 세계가 집약됐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함양아 작가의 작업은 특정한 입장을 전달하기보다 현실의 개별 사례를 수집·분류·추상화해 시스템의 작동 방식 자체를 시각화한다"며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역시 계속 발전해 나가는 구조를 만드는 리서치 기반 실천의 중요한 사례"라고 말했다.

작가 함양아. 아트선재센터 제공. 사진 남서원.
함양아 작가. /아트선재센터
금호미술관에서는 박혜수 개인전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가 관객을 만난다. 분쇄된 지폐와 설문, 영상, 퍼포먼스 등을 활용해 진실을 외면하고 집단의 결속을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본다.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는 작업을 통해 감시와 혐오, 배제의 메커니즘을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송지원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는 "2010년 금호영아티스트로 선정했던 박혜수를 16년 만에 다시 조명하는 전시"라며 "신진 작가에서 중견 작가로 성장한 그의 창작과 연구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라고 말했다.

여성 작가를 조명하는 흐름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리움미술관의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마르타 미누힌, 주디 시카고, 리지아 클라크 등 국제적인 여성 작가들의 실험과 한국 여성 환경미술의 선구자 정강자의 작업을 함께 조명한다.

9월 5일부터는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였던 구정아의 개인전 '구정아: 우스모스'가 열린다. 30여 년간 야광과 자석, 향, 공간 등 비가시적인 감각과 에너지를 탐구해 온 작가의 작업을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관 개인전으로 선보인다. 로비와 고미술 상설전시실 등 리움미술관 곳곳으로 작업 영역을 확장해 미술관 전체를 하나의 감각적 환경으로 바꿀 예정이다.

1. @KOO JEONG A
구정아 작가. /리움미술관
이 같은 흐름을 단순히 '여성 작가의 부상'이라는 최근의 유행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김선정 예술감독은 "서구에서 제기된 페미니즘 미술사의 문제의식이 한국의 제도와 조건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며 "1980년대 민중미술 내부의 여성 작가부터 1990년대 이후 다양한 계보와 맥락에서 작업해 온 작가들이 최근 동시에 조명되면서 비로소 그 사이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트선재센터는 개관 이후 이불·임민욱·이주요·구정아·양혜규·정서영·남화연·이미래 등 여성 작가들의 개인전을 꾸준히 열어왔다. 김 예술감독은 "여성 작가들의 전시가 최근 급부상했다기보다 서서히 형성된 흐름"이라며 "이번 함양아 전시도 여성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작가의 작업 자체가 지닌 가능성에 주목해 온 방향의 연장선"이라고 했다.

올해 이어지는 여성 작가들의 전시는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시간을 복원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불안과 변화까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여성 미술'이라는 별도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의 계보와 동시대 미술의 서사를 더욱 넓게 다시 쓰는 과정이다.

박혜수_2026, 휴먼렌탈서비스 듣기만 하는 사람
박혜수의 '휴먼렌탈서비스: 듣기만 하는 사람'. /금호미술관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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