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팀이 펼친 쓰기의 변주
첫 ‘가갸날’ 100년·훈민정음 반포 580돌 맞아 한글의 과거와 다음 시간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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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그 여정을 돌아보기에 더욱 특별하다. 1926년 첫 '가갸날'을 기념한 지 100년,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 겹치는 해다. 그러나 기념의 시선을 과거에만 둘 필요는 없다. 6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이 문자를 우리는 앞으로 무엇으로, 어떻게 쓰게 될까.
경남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5회 한글실험프로젝트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는 그 질문을 '쓰기'와 '도구'의 관계에서 들여다본다. 국립한글박물관이 2025년 개최했던 전시를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공동으로 다시 선보인다. 23팀의 작가와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전시가 주목하는 것은 완성된 글자보다 글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쓰기는 글자의 조형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시작점이자 생각을 기록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언제나 도구가 있었다. 붓과 펜에서 디지털 스타일러스까지 무엇을 손에 쥐느냐에 따라 남겨지는 흔적도 달라진다. 도구의 물성이 글자의 형태와 질감에 스며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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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호가 글을 쓰던 '자리'를 바라본다면 김대연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손'을 좇는다. '글자의 깊이'는 붓으로 글자를 쓸 때 발생하는 힘과 압력, 붓의 속도와 궤적을 시각화한다. 종이에 남은 획만이 아니라 그 획이 만들어지는 동안 손과 붓이 지나온 움직임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손은 더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도 찾아왔다. 메이저 마이너리티의 '쓰기의 기술: 속기에 대한 임의적 연대기'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빠르게 옮겨 적는 속기를 역사와 직업, 언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살핀다. 전문 기술로서 속기가 등장한 과정과 속기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 약어를 이용한 기록 방식 등을 통해 근현대 한국에서 쓰기가 변화해온 시간을 펼쳐놓는다.
붓으로 천천히 한 획을 남기는 일과 빠르게 사라지는 말을 붙잡아 기록하는 일. 모두 같은 문자를 쓰지만 무엇을 손에 쥐고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쓰기의 풍경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부터 다른 도구와 방식으로 한글을 써왔다면 지금의 글자도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리프트오프의 '한글의 또 다른 시간'은 그 가정에서 출발한다.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흥미롭다. '붓을 사용하면서 한글을 가로로 썼다면 한글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작품은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전통적인 붓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쓰기 조건에 맞춰 한글의 조형을 재구성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한글의 시간을 상상하며 쓰기 도구와 방향이 글자의 형태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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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서도 사람의 몸과 문자는 가까이 있었다. 1443년 창제돼 1446년 세상에 나온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에서 자음의 기본 글자를 만들고, 하늘과 땅, 사람에서 모음의 원리를 찾았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살펴 글자를 만들었던 한글이 이제는 글씨를 쓰는 손의 속도와 압력까지 데이터로 기록하는 환경과 만난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붓을 쥐고 글자를 만드는 주체마저 달라지기 시작한다. AI와 로봇이 쓰기의 과정에 들어오면서다. 전시장에는 그 변화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교차한다. AI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에도 자신의 언어로 계속 쓰는 이유를 되묻는가 하면, 한글로 쓴 시와 그림을 AI와의 대화를 거쳐 새로운 이미지로 확장한다. 인간 대신 로봇이 붓을 들고 키보드와 패드를 누르는 풍경도 등장한다. 도구에 관한 질문은 어느새 '무엇으로 쓰는가'를 넘어 '누가 쓰는가'에까지 닿는다.
김초엽의 '사각의 탈출'은 아예 한글이 사라진 미래로 향한다. 작품에는 AI로 글쓰기 과정을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문자 '네모'가 등장한다. 한글과 쓰기 도구, 인공지능을 결합해 아직 오지 않은 쓰기의 모습을 상상한다. 지금의 한글을 설명하는 대신 한글이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문자의 다음 시간을 바라본다.
하나가 아직 오지 않은 문자의 시간을 상상한다면, 다른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글을 새로운 기술의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박윤형의 '데이터의 유물: 임의의 반경의 원'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이상(1910∼1937)의 시를 분석하고 이를 2차원 이미지와 3차원 오브젝트로 순차적으로 변환한다. 한 단계에서 만들어진 데이터는 다시 다음 단계의 재료가 된다. 이상의 글은 파편으로 흩어졌다가 이 과정을 거쳐 마지막에는 비석 형태의 '데이터의 유물'로 재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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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돌아 다시 세종대왕 앞에 서면 처음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보인다. 김영원이 세밀하게 빚어낸 세종의 한 손에는 여전히 책이 펼쳐져 있다. 580년 전 세상에 나온 문자는 그동안 수많은 손과 도구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한글날 100년을 맞은 2026년.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는 한글의 긴 시간을 돌아보면서도 시선을 과거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다음 100년, 우리는 한글을 무엇으로 쓰게 될까. 전시가 내놓는 것은 하나의 정답보다 아직 쓰이지 않은 여러 가능성에 가깝다. 580년을 건너온 한글은 여전히 '쓰이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