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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걷기만 해도 세상이 더 화사해 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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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1. 08. 26. 08:38

[지리산 종주] 벽소령~장터목~천왕봉~중산리
1박2일 지리산 종주에 나선 한 등산객이 천왕봉 정상에 올라 지나온 고봉들을 바라 보는 순간 안개가 기둥을 타고 오르듯 몰아치며 또다른 세상을 연출하고 있다. 
[아시아투데이=양승진 기자] 지리산은 애써 치장하지 않는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이라는 수식어답게 다소 위압적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과 마주하면 그저 뒷동산처럼 가까워진다.

지리산은 예전부터 산에 들면 산이 되는 사람들이 만나 길을 열고 세상을 관조하는 그런 통로가 됐다.

성삼재~천왕봉~중산리 1박2일 종주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녀 고통이 수반되지만 길은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약(藥)이어서 써도 좋을 만큼 진한 감동을 준다.

걷기만 해도 세상이 더 화사해지는 길, 그 길이 바로 지리산 종주길이다. 
                                     /지리산=글·사진 양승진 기자 ysyang@asiatoday.co.kr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스멀스멀 안개가 기어오르면 천상(天上)의 세계가 열리는 듯하다.
아시아투데이는 지리산 1박2일 종주를 성삼재에서 시작해 노고단대피소~임걸령~화개재~연하천대피소~벽소령까지 1박 구간을 첫 회에 싣고, 그 두 번째로 벽소령대피소~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_법계사~중산리까지 나눠 연재한다.

처서가 지나면서 지리산도 여름이 한풀 꺾였지만 태풍 ‘무이파’가 할퀴고 지난 길목은 여전히 통제되고 있다.


벽소령대피소의 새벽 풍경. 갑자기 소나기가 오면서 대피소로 몰린 등산객들이 앞마당에서 비박을 하고 있다.
◇애쓴 만큼 보람...지리산에서 사람 되다

벽소령에서 1박을 했다면 천왕봉 일출은 포기하고 장터목의 고사목에 포커스를 맞추면 한결 편하다.

벽소령에서 천왕봉은 11.4km로 꼭 7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라 밤 새워 가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리하면 볼 수도 있겠지만 산에서의 무리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벽소령에서 세석대피소로 가는 6.3km는 3시간 넘게 걸리고 길도 좀 험한 편이다.

벽소령은 지리10경 중 벽소명월(碧消明月)로 유명하다.

벽소령에서 세석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 산허리를 돌아 오롯한 소로 길로 선비샘까지 한 40분간 오르막이다.

남쪽 사면을 타고 내려가면 갑자기 시야가 확 터지면서 선비샘이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져온다. 옛날 선비샘 아래 상덕평에는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은 노인이 살았다. 이 노인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받고 싶다는 게 소원이었다. 그 아들들이 선비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샘물을 뜰 때마다 허리를 굽히니 자연스레 인사를 하게 한 것이다. 결국 소원은 이뤄졌다.

선비샘에서 물을 채우면 세석대피소까지 지리산 종주 중 가장 험한 구간을 가게 된다.


물을 긷고 올라오면서 본 세석대피소 모습. 이곳에도 안개가 몰려 있다.  
뾰족뾰족 하게 나온 바위산을 몇 개나 비껴가다 보면 금세 허기져올 만큼 힘이 든다. 하지만 지리산은 애쓰는 만큼 보람도 준다. “이 험한 산길을 왜 왔을까”하고 자문자답하다 보면 뭔가 잡힌다.

“전생에 지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온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그럼 지리산을 몇 차례 종주한 사람은 뭐냐고 물으면 “그만큼 죄가 많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몸이 성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경치를 본다는 데 의미를 두면 그만큼의 고통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늘 감사하고 겸손해지는 게 사람의 도리다.

세석까지의 길은 육산인 지리산에서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칠선봉(七仙峰) 등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암릉길이 나온다. 다소 거친 산의 모습이지만 길가에 핀 금강초롱 등 야생화가 해맑은 웃음을 보이면 따라서 웃어본다.

시기가 봄이라면 영신봉 이정표에서부터 연분홍 철쭉들이 얼굴을 보이겠지만 여름철이라 광활한 고원지대가 나타나면 이곳이 세석(細石)이다.

‘남녘의 개마고원’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작은 돌맹이라는 뜻으로 ‘세석평전’이라 부르지만 ‘평전’이 일본식 표기여서 지금은 안 쓴다.

예전에는 수 십여 가구가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세석에서 점심을 먹고 물을 채운 후 길을 나서면 촛대봉까지는 폭 넓은 길에 비교적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포개져 있는 촛대봉에서 온 길을 돌아보면 반야봉을 필두로 마치 용틀임하는 듯 산세가 꿈틀댄다. 앞으로는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고 한신골과 도장골도 깊게 내려다보인다.


갑자기 시야가 터지며 안개가 걷힌 장터목. 한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돼 전형적인 고산 숲 형태에서 고사목만 드문드문 서 있다.
◇사람이 버린 산...산은 그래도 사람을 살린다

계단 길을 내려서면 기암과 고사목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선다.

촛대봉에서 연하봉 구간 길은 지리산 10경 중 연하선경(煙霞仙境)이라고 부를 만큼 온갖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리고 거기에 드문드문 고사목까지 더해져 감탄사가 절로 난다.

연하봉을 넘어서면 이번엔 일출봉(日出峰)이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1시간 넘게 가야하고 날씨마저 받쳐주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일출을 봐도 무방하다. 탁 트여진 천왕봉보다 오히려 호젓하고 고사목과 어우러진 주변 경관 때문에 더 아기자기한 맛이 난다.

장터목(場基項)은 예전에 물물 교환하던 장터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주민과 함양군 마천면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넘나들던 곳으로 과거 백제 때부터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고(最高) 시장이었던 셈이다.
장터목대피소는 5개의 등산로가 모이는 곳이어서 너른 마당을 지녔고,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제석봉 오르는 길에 만난 구상나무. 수 많은 세월을 견뎌온 그 늠름함이 보기만 해도 기개가 느껴진다.
대피소 뒤로 난 계단 길로 오르면 구상나무와 분비나무들이 손짓하고 평평해진 초원지대와 고사목이 어우러지는 제봉석(帝釋峰)이다.

예전에는 전형적인 고산 숲 형태를 띠었으나 한 인간의 욕심에서부터 시작된 도벌은 결국 제석봉에 불을 질러 숲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선조들의 무지막지함이 어떤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산교육장이다.

제석봉 이정표에서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인다.

암봉 연릉길이 톱날같이 이어지는 다소 험한 길을 가면 통천문(通天門)이다.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이 길은 철계단이 대신하면서 지금은 손쉽게 오를 수 있다.

통천문에 올라서면 이 일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가파르게 설치된 철봉을 잡고 오르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오는데 산사태로 형성된 지형이란다.

다소 가파른 길을 걸어 오르면 천왕봉 표지석이 눈에 들어오고 바로 밑에 너른 공터가 나온다.


천왕봉 정상에 오른 사람들. 지치고 힘들지만 표정만큼은 넉넉해 보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천왕봉(天王峰, 1915m)에 오르면 거칠 것 하나 없는 장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표지석 뒷면에 써 있는 ‘한국인(韓國人)의 기상(氣像) 여기서 발원(發源)되다’는 말처럼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전율이 전해진다.

날씨가 맑으면 멀리 남해바다가 조망될 정도로 시야가 툭 터진다.

어느 정도 땀을 식혔다면 이젠 내리막이다.

천왕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대원사로 가야 종주길이 제 맛이지만 태풍 피해로 길을 막아 중산리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중산리코스는 좀 투박한 면이 있어 등산객들은 장터목에서 하산을 좋아한다. 하지만 중산리계곡코스도 태풍 피해로 무기한 통행이 금지됐다.

천왕봉에서 법계사를 거쳐 중산리로 내려서는 길은 5.9km로 3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끊임 없는 내리막길이어서 체력의 한계를 가늠하게 한다.

천왕봉에서 다소 거친 돌계단 내리막을 400m 가면 천왕샘이다. 1800m 이상 고지대에서 바위 틈새로 고이는 물이어서 물맛을 보기는 쉽지 않다.


연하봉으로 오르는 등산객들. 끝도 없는 길이라 한 켠에 앉아 쉬어가도 좋다.
계단길을 내려서면 개선문(凱旋門)이 나오는데 서쪽의 통천문과 같이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 격이다. 사찰에서 얘기하는 일주문 같은 성격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가파른 계단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법계사다. 1400m 높이로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이 절은 3층석탑이 유명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법계사와 아래위로 붙은 곳이 로터리대피소다.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중산리로 내려가면 되지만 도저히 안 된다 싶으면 법계사 신도들을 날라다 주는 버스를 타고 된다.

하지만 종주를 했다고 떳떳하게 말하려면 또 걸어야 한다.

경사진 길을 내려가면 망바위가 나오는데 망을 보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망바위를 내려서면 칼바위로 이어지면서 물소리가 가까워지고 중산리 계류가 바닥임을 알린다.

참나무, 박달나무 등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걸으면 장터목대피소 갈림길이고 출렁다리를 지나 낙엽송 길을 따라가면 순두류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뒤를 돌아보면 천왕봉이 다락방처럼 올려다 보이는데 유일하게 천왕봉을 볼 수 있는 창(窓)이다.

법계교 야영장 입구에서 비포장길을 따라가면 두류동 주차장이고 지리산 종주 33.4km의 끝이다.

잠시 평상에 앉아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된다.

가는 길 내내 비추던 안개와 고사목 그리고 장쾌한 능선 등 ‘8월의 오케스트라’는 온 데 간 데 없다.

산문(山門)을 나서면 선계(仙界)는 커녕 또다시 물욕(物慾)이 앞장선다.

종주 산행은 보고 들은 것 하나 없이 그저 허허로움만 남는 듯하다.


연하봉에 오른 한 등산객이 숨을 고르며 바위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여행메모

지리산 종주 산행은 날씨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비가 오면 배낭까지 덮을 수 있는 우비가 편하지만 그만큼 행동반경이 둔하고 무게감도 더 든다. 배낭 커버만 씌우고 몸에 우비를 입어도 어차피 오는 비를 다 물리칠 수는 없다.

특히 비올 때를 대비해 간편식을 준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버너나 코펠을 사용하기가 번거롭고 불 피우기가 힘들 때도 있다.

일단 걷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편한 등산화는 기본이고 양말을 여러 쪽 준비해 구간마다 갈아 신으면 좋다.

천왕봉에서 중산리까지의 내리막길은 무릎에 많은 부담을 주기 때문에 여유 있게 하산하는 게 그나마 도움이 된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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