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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기획 시리즈] 아! 3500 대한독립군단이여! <2회.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된 미산(密山)>

[단독기획 시리즈] 아! 3500 대한독립군단이여! <2회.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된 미산(密山)>

기사승인 2016. 07. 0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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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서일 총재의 항일투쟁유적 기념비. 서일 총재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
허룽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시에서 하룻밤을 묵은 기행단은 6월 25일 아침 일찍 중국 헤이룽장성에 위치한 미산(密山)시로 향했다. 이날은 다행히도 날씨가 맑아 도로사정이 양호했다. 여름이지만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와 기행단의 발걸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미산은 허룽시에서 약 250Km 떨어진 곳으로 둥안(東安)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단장_밀산-crop
기행단이 무단장시에서 미산으로 이동한 경로. 250km 가량의 거리다. 다행히도 날씨가 맑고 도로사정이 좋아 큰 어려움 없이 이동이 가능했다.
미산은 독립군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기 전 집결해 통합·재편성되어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된 곳이다. 독립군이 주 활동무대였던 간도를 떠나 연해주로 이동하게 된 것은 일본이 일으킨 간도사변(기자 주: 경신사변이라 부르기도 함) 때문이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작전을 전개했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들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다. 특히 독립군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젊은 남자들은 우선적인 학살 대상이었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 간 간도일대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000명 이상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피해자는 적어도 수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군은 간도지역 동포들이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독립군이 간도를 떠나 일본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연해주로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알았고 이를 위해 미산에 집결해 부대를 재편성한 것이다.

미산에 도착한 기행단이 먼저 찾은 곳은 북로군정서의 지도자였던 대종교 서일 총재의 항일투쟁 유적지였다. 유적지에는 서일 총재의 항일투쟁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서일 총재에 대한 소개와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기록되어 있다.
서일 총재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 뒷면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서일 총재의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 뒷면. 서일 총재에 대한 설명과 항일투쟁이력이 새겨져있다.
기행단은 이어 서일 총재가 자결한 곳으로 알려진 당벽진으로 향했다. 당벽진은 미산 인근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서일 총재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뒤에도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미산 인근의 당벽진에 머물며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서일 총재는 간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규합해 둔병제를 실시했다. 둔병제는 농번기에 농사를 지으며 군량과 물자를 비축하고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실시해 군사조직을 유지하는 제도다. 당벽진에 가보니 야트막한 야산의 사방에 광활한 농지가 펼쳐져 있고 농지 한가운데 하천이 흐르고 있어 농사를 짓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공격해 올 경우 인접한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피할 수 있는 도주로까지 확보되어 있어 군사조직을 양성하기에도 알맞은 입지였다.
미산 지역의 농지
헤이룽장성 미산 지역의 광활한 농지. 헤이룽장성 대부분의 농지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벼를 재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인 재중동포 김만송씨는 미산 지역에 정착했던 조선인 부락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서일 총재는 1921년 8월 비적들로부터 주둔지를 습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고 이에 큰 충격을 받아 당벽진 뒷산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행단은 서일 총재의 자결 지점에 가고자 했으나 해당 지점은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데다가 늪지대화 되어 있어 안전상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었다. 기행단은 어쩔 수 없이 자결 지점이 보이는 곳에서 서일 총재에 대한 추모제를 지냈다. 이번 추모제 역시 제주(祭主)는 국가원로회의 회원인 이상면 서울대 법대 전 교수가 맡았으며 집전은 대종교의 장영선씨가 맡아 엄숙하게 치러졌다.

서일 총재 자결 지점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서일 총재가 자결한 지점. 서일 총재는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미산 인근의 당벽진에 머물며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비적들로부터 주둔지를 습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고 이에 큰 충격을 받아 당벽진 뒷산에서 자결했다.
서일 총재 추모제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서일 총재에 대한 추모제. 서일 총재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총지휘했다.
기행단은 미산시 한흥동(韓興洞)으로 향했다. 한흥동은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상설 선생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근거지 구축을 위해 설립한 마을이다. 현재 중국 현지에서는 한흥동이라는 이름 대신 임호촌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 이상설 선생은 1906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과 함께 거액의 공작금을 받았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가 1년 연기됨에 따라 시간의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이상설 선생은 이 공백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이승희·유인석과 함께 공작금을 이용해 미산에 황무지 45방(方)을 사들였다. 그 후 1909년 조선인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구축한 것이 한흥동이다. 이상설 선생은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워 우리말과 문화를 교육하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 역사 교육을 했으며,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임호촌 표시석
미산 인근에 위치한 임호촌 표시석. 임호촌의 원래 이름은 한흥동((韓興洞)이다. 한흥동은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상설 선생이 만주의 독립운동 전초기지로 삼을 목적으로 만든 마을이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기행단은 미산 근처의 훙커호(興凱湖)로 향했다. 훙커호는 중국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와의 국경에 있는 담수호로서 ‘만주의 바이칼’로 불릴만큼 광대하다. 4,400 평방Km에 달하는 훙커호는 서울의 7배가 넘는 면적을 자랑한다. 실제로 훙커호의 호반에 서니 마치 바다처럼 보일 정도로 광활했다. 훙커호는 대한독립군단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이 연해주로 이동한 후에도 간도지역에 남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 세력에게 무기와 물자를 전달해 주는 보급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인 재중동포 김만송씨는 “작은 배로 운송할 수 있는 물자에는 한계가 있었고 육로를 이용해 물자를 운송할 경우 일본군의 검문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호수가 얼어붙는 겨울에는 썰매를 이용해 호수를 가로질러 무기와 물자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겨울에 훙커호의 요긴함이 더해졌다”고 설명했다.

훙커호
헤이룽장성에 위치한 훙커호(興凱湖) 서울시 면적의 7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을 자랑한다. 이 호수는 대한독립군단의 물자운송로 역할을 했다.
훙커호 방문을 마치자 날이 어두워졌다. 기행단은 다음 목적지인 러시아로 가기 위한 관문인 헤이룽장성 쑤이펀하(綏芬河)시로 향했다. 칠흑같이 어둡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6시간 남짓 달린 기행단은 쑤이펀하에 도착해 중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밀산_수분하-crop
기행단이 미산에서 쑤이펀하로 이동한 경로. 250km가 약간 넘는 거리지만 비포장도로가 뒤섞인데다가 가로등도 없는 산길이 곳곳에 나타나 6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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