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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기획 시리즈] 아! 3500 대한독립군단이여! <4회. 자유시 참변의 현장>

[단독기획 시리즈] 아! 3500 대한독립군단이여! <4회. 자유시 참변의 현장>

기사승인 2016. 07. 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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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네첸스크에서 하룻밤을 묵은 기행단은 27일 아침 인근에 항일투쟁 유적지가 있다는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유적지로 향했다. 유적지는 달레네첸스크 역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숲 속에 있었다. 현지 안내를 맡은 송지나 러시아 극동연방대 한국어과 교수는 해당 유적지에 대해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의병 세력의 유적지”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이 괴멸된 이후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던 세력이었다. 이들에 대해 일본군은 무자비한 탄압을 벌였으며 달레네첸스크 역 인근에서 40여명을 학살하고 그 시신을 그대로 방치해두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인들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고 기념비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달레네첸스크 항일투쟁 유적지
달레네첸스크 항일투쟁 유적지에 세워진 기념비. 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의병세력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추모하는 기념비다.
유적지를 둘러본 기행단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달레네첸스크 역으로 향했다. 중국 미산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은 달레네첸스크에 집결해 열차를 타고 자유시(현 스보보드니)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역에는 과거 사용했던 구 역사 옆에 신 역사가 세워져 있다.
달레네첸스크 항일투쟁 유적지
달레네첸스크 항일투쟁 유적지에 세워진 기념비. 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의병세력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추모하는 기념비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에 기행단은 열차에 탑승했다. 플랫폼으로부터 열차까지의 높이가 상당해 아이들이나 노약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탑승하기도 어려워보였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객차는 1·2·3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객차마다 9개의 객실이 있는데 1등 객차는 칸막이가 있는 1개 객실을 2명이 사용하고, 2등 객차는 4명이 사용해 비교적 쾌적한 환경에서의 여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3등 객차는 객실에 칸막이 구분이 따로 없고 1개 객실을 6명이 사용한다. 열차에 탑승해 기행단의 좌석이 있는 3등 객차로 들어서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기행단을 맞이했다. 여름인데다가 54명의 승객이 비좁은 객차 안에 꽉 들어차 있어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열차 좌석은 기본적으로 침대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좌석마저도 매우 비좁아 겨우 몸을 간신히 눕힐 정도의 공간밖에 되지 않는다. 키 178cm인 기자가 눕자 정수리와 발바닥이 동시에 위아래 벽에 닿을 정도였다. 열차가 정차역에 들어설 때마다 잠시 내려 바깥공기를 마시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렇게 18시간, 1000km 가량을 달린 기행단은 다음날인 28일 아침 11시경 스보보드니에 도착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
자유시 참변의 현장. 사진 중앙 우측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급수탑이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은 저 급수탑 주변에 주둔지를 형성했다.
스보보드니에 도착한 기행단은 먼저 현지에서 기행단의 발이 되어 줄 차량을 수배했다. 다행히도 역 근처에 개인 영업을 하는 운전기사들이 있어 어렵지 않게 수배할 수 있었다. 기행단은 곧바로 현지 시장에서 추모제를 위한 제수용품을 구입한 뒤 자유시 참변의 현장으로 향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은 스보보드니 역에서 약 3km가량 떨어진 철도차량기지 인근에 있다.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자유시 참변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급수탑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행단은 철도차량기지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급수탑을 지나쳐 내려왔다. 급수탑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1921년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
자유시 참변의 현장. 당시 대한독립군단은 이 급수탑 주변에 주둔지를 형성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1921년의 급수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스보보드니에 자리잡은 대한독립군단은 이 급수탑 주변에 주둔지를 형성했다. 그리고 1921년 6월 28일, 고려공산당을 선두에 내세운 레닌의 볼셰비키 세력은 장갑차까지 동원해 대한독립군단의 주둔지를 급습했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두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었던 탓에 설마 자신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갑차의 기관포가 불을 뿜고 주변을 완전 포위한 볼셰비키들의 집중사격이 퍼부어졌다고 한다. 대한독립군단이 그 아무리 일당백의 용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한들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자유시 참변 현장 약도
1989년 8월 15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자유시 참변 현장 약도
육교 위에 서서 급수탑 주변을 내려다보니 그 당시 대한독립군단이 어떻게 주둔지를 형성했는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급수탑 좌우로 뻗은 철로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볼셰비키 세력이 대한독립군단을 향해 사격을 가하는 모습까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다. 안타깝게도 스보보드니 철도차량기지는 군사시설로 지정되어 있어 사진촬영이 허용되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을 피해 급수탑 사진을 찍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유시 참변 현장을 방문한 기행단은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 제야 강변으로 향했다. 제야 강은 아무르강의 지류로서 폭 300여미터에 달하는 큰 강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세력의 집중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2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 용사들은 제야 강을 헤엄쳐 건너 도주하려 했으나 대부분 익사하고 말았다. 당시 35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 중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864명이며 이마저도 포로가 되어 살아남은 것이다.
대한독립군단 추모제
대한독립군단 추모제를 지낸 역사기행단. 현지 러시아인들도 자유시 참변의 역사적 의의를 듣고 기꺼이 추모제에 동참했다.
피로 물들었던 95년 전과 다르게 제야 강의 물은 맑고도 잔잔했다. 아마도 이 제야 강에는 원통함을 안고 숨진 대한독립군단의 유골도 남아 있을 것이다. 기행단은 엄숙한 마음으로 제야 강변에 추모제를 준비했다. 이번 역사기행의 최종 목적이자 마지막 추모제가 열렸다. 제주(祭主)는 국가원로회의 회원인 이상면 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맡고, 집전은 대종교의 장영선씨가 맡아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추모제를 마지막으로 대한독립군단 역사기행단의 공식적인 일정은 모두 종료됐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의 머릿속에는 ‘만약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 그 누구도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자유시에 잠든 대한독립군단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라는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잠든 대한독립군단. 이제라도 그들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자주독립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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