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여행] 백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북 익산
2020. 07. 15 (수)
  1. 춘천
  2. 강릉
  3. 서울
  4. 인천
  5. 충주
  6. 대전
  7. 대구
  8. 전주
  9. 울산
  10. 광주
  11. 부산
  12. 제주

뉴델리 33.6℃

도쿄 20.8℃

베이징 33.1℃

자카르타 29.8℃

[여행] 백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북 익산

기사승인 2020. 05. 26. 14:1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여행/ 익산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 20년간 보수정비를 마치고 지난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탑의 모습을 알 수 없기에 발견 당시 허무러진 면을 그대로 뒀다.


익산 글·사진 김성환 기자 = 역사는 승자가 쓴다. 패자는 지워진다. 고대왕국 백제는 신라에 패했다. 백제의 땅이었던 곳에서도 온전한 백제의 것을 보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건물이 불타고 남은 터에 부서진 석탑만 덩그렇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도 많다. 진실은 아득하고 전설만 구구하다.

전북 익산이 한때 그랬다. 백제는 한성, 웅진, 사비시대로 구분된다. 요즘은 ‘익산 백제’를 추가하는 분위기다. 백제가 이 땅을 왕도(王都)로 삼을 계획이었거나 적어도 왕이 별도(別都)로서 경영했다는 학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건물 터의 내력이 드러나고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니 전설이 비로소 역사가 되고 있다.
 

여행/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 미륵사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왼쪽이 미륵사지 석탑(서탑), 오른쪽이 동원 구층석탑(동탑)이다.


익산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도시다. 무왕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설화’의 주인공이다. 또 나라 잃은 비운의 군주 의자왕(재위 641~660)의 아버지다. 설화에서 서동은 신라로 숨어든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밀회를 암시하는 노래(서동요)를 퍼뜨린다. 끝내 공주와 결혼하고 민심까지 얻어 백제의 왕이 된다.

서동은 행복했을까. 적어도 왕으로서 삶은 치열했다. 무왕 재위 기간 백제 안팎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숙적 신라를 향한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무왕은 영토 회복을 위해 신라와 10여 차례 이상 전투를 치렀다. 고구려와 관계도 순탄지 않았다. 백제의 토착세력은 왕을 쥐고 흔들었다.

지금까지 맞춰진 ‘퍼즐’은 이렇다. 무왕은 새로운 정치적 기반이 필요했다. 사비를 벗어나 고향인 금마를 중심으로 세를 불릴 계획을 세운다. 금마는 익산의 옛 지명이다. 별궁을 짓고 민심을 추스리기 위한 국가사찰도 건설한다.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 이 흔적이 오롯이 남았다. 이를 발판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백제의 부흥을 도모한다. 그러나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죽어 묻힌 곳이 익산 쌍릉이다. 익산의 백제 유적 대부분이 무왕과 관련이 깊다.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 동원 구층석탑.


미륵사지는 금마면 용화산(미륵산) 아래 있다. 적요한 절터는 광활했다. 눈으로 슬쩍 훑어도 끝이 아득했다. 미륵사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다고 전한다. 서원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의 위용은 웅장했다. 서기 639년에 세워졌다. 한쪽 면이 무너져 내린 채 방치됐다가 191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시멘트로 보수되는 곡절을 겪었다. 2001년부터 대대적인 조사와 정비가 시작됐다. 20년이 지난 지난해 시멘트를 완전히 걷어낸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14.5m, 폭 12.5m, 무게 약 1830톤의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최대(最大)의 석탑이다. 탑은 9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보수 전의 모습대로 딱 6층까지만 복원됐다. 부재도 원래의 것을 최대한 사용했다. 허물어진 부분은 그대로 남겨뒀다. “역사책 어디에도 원래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제 모습을 알 수 없으니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잘 한 일이다. 동원의 구층석탑(동탑)은 1991년 옛 부재를 쓰지 않은 채 급하게 복원됐다. 자태가 좀 우스워졌다.


미완의 미륵사지 석탑은 아름답다. 석탑을 목탑처럼 쌓았다. 나무를 조각내듯 돌을 깎아 쌓아 올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백제인의 기술은 섬세했다. 그래서 백제는 화려했다. 금동대향로 같은 유물은 문화재에 문외한의 눈까지 번쩍 뜨이게 만든다. 높이 90m에 달하는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을 주도한 인물도 백제의 아비지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는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목탑은 흔적이 없다.

‘삼국유사’는 미륵사는 왕후의 청을 받은 무왕이 세웠다고 전한다. ‘왕후’는 지금까지 선화공주로 여겨졌다. 미륵사지 석탑 정비 중에 ‘639년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석탑을 공양했다는 금판의 글자가 발견됐다. 왕후가 사택왕후로 굳어졌다. 그럼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일까. 무왕의 부인이 여러 명이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나왔다. “안원왕이나 산상왕처럼 고구려에도 여러 명의 부인을 둔 왕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두 탑 중 하나는 분명 선화공주가 봉양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여행/ 왕궁리 5층석탑
왕궁리 유적의 왕궁리 오층석탑. 언제 세워졌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표적인 백제의 탑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았다.
여행/ 왕궁리 유적
백제의 별궁 터로 추정되는 왕궁리 유적.


왕궁면의 왕궁리 유적은 백제의 별궁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왕궁리’라는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야트막한 구릉에 올라서니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멀리 미륵산성과 익산토성, 들판이 다 눈에 들어왔다. 왕궁이라면 이런 곳에 들어서야 할 것 같았다.

익산 천도에 관한 언급은 ‘관세음응험기’에 나온다. 중국 육조시대의 관세음신앙을 기록한 고서다.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천도해 새로 정사를 경영했다’고 쓰여있는데 학계에서는 ‘무광왕’이 무왕이고 ‘지모밀지’는 왕궁리의 옛 지명인 ‘모질메’ ‘모지밀’ 등의 변형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럼 ‘관세음응험기’는 믿을만할까. 이 고서에는 제석사에 관한 언급도 나온다. 제석사는 무왕이 세운 왕궁사찰로 전한다. 1993년 왕궁리 유적 가까운 곳에서 제석사지가 발견됐다.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회랑 등이 확인됐고 ‘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도 출토됐다. 고서의 내용이 허투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대동지지’에는 ‘익산은 무왕의 별도(別都)였다. 그는 성을 쌓고 별도를 두어 금마저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행/ 익산 제석사지
익산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발굴조사 중이다. 폭 3m, 동서 245m, 남북 490m의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쌓인 궁이 있었고 왕이 정사를 보던 정전 건물지를 포함해 14개의 백제 건물터가 나왔다.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백제 최고의 화장실 유적도 확인됐다.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은 언제 세워졌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찬찬히 살펴보면 대표적인 백제의 탑으로 꼽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이 풍긴다. 미륵사지와 왕궁면의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충남 공주와 부여의 백제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백제역사 유적지구)에 등재됐다.
 

여행/ 익산 쌍릉 소왕릉
익산 쌍릉 소왕릉.
여행/ 익산 쌍릉 솔숲길
익산 쌍릉 솔숲.


무왕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백제는 패망한다. 무왕은 익산 쌍릉 대왕릉에 묻혔다. 쌍릉에는 대왕릉과 소왕릉이 있다. 각각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여겨졌다. 대왕릉의 주인은 무왕으로 굳어지고 있다. 2018년에 대왕릉에서 인골이 발견됐다. 640년대에 사망한 신장 160~170cm의 노인 남성의 것으로 확인됐다. ‘삼국사기’는 무왕을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묘사했다. 이 정도 신장이면 당시로서 ‘풍채가 훌륭한 것’이었다. 목관의 재질은 공주 무령왕릉 목관, 부여 능산리 고분군 일부 목관과 같은 금송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해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것일까. 여전히 미스테리다. 소왕릉에서는 아무것도 발굴되지 않았다. 대왕릉과 소왕릉은 단아한 솔숲이 이어진다. 200m 남짓한 길에는 곰삭은 시간의 여운이 솔향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여행/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 중인 익산 쌍릉 대왕릉 목관.


미륵사지 옆에 최근 국립익산박물관이 새 단장해 문을 열었다. 경관을 고려해 땅 아래로 지었다. 일본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도 환경을 고려해 이렇게 지어졌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 자체가 볼거리다. 어쨌든 국립익산박물관은 미륵사지에서 나온 출토품 2만3000여 점을 비롯해 전북 서북부의 각종 유적에서 출토된 약 3만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국보와 보물 3건 11점 등 3000여 점의 전시품을 상설전시한다. 쌍릉 대왕릉의 목관도 여기서 볼 수 있다.

때로는 눈을 감아야 더 많이 보일 때가 있다. 익산이 그렇다. 눈을 감으면 웅장한 가람을 거느린 사찰과 아름다운 석탑,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인파로 북적이던 1400년전의 백제가 보인다.  



ⓒ"젊은 파워, 모바일 넘버원 아시아투데이"


댓글
기사 의견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