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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의식 부재의 무모함...일본 항복문서 조인식과 미 흑선의 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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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 09. 04. 06:59

1945년 미 해군장교, 1만4500km 성조기 운송 특명
1차 세계대전 전몰용사의 아들, 데이트 약속 어기고 특명 완수
미 전설적 제독, 일 개방 흑선 성조기, 일 항복문서 조인식에 사용토록 해
하만주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아시아투데이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하루 앞둔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전한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의 비사를 보면서 미국의 저력과 역사의식 부재에서 나온 일본의 무모함을 새삼 느꼈다.

한 해군 장교가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東京)만 앞 미 해군 항공모함 미주리호에서 거행된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 사용될 성조기를 9000마일(1만4484km) 떨어진 도쿄까지 운송하는 특별 임무를 맡아 미 워싱턴 D.C.를 출발하면서 그날 저녁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WP는 전했다.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가 1945년 8월 15일(미국시간 14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일본이 공식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조인식은 9월 2일 오전 9시에 예정돼 있었다.

이 해군 장교는 여자친구와 저녁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인 8월 23일 오전에 성조기 운송 특명을 받고 같은 날 저녁 7시에 좌석도 없는 화물기 편으로 뉴워싱턴내셔널공항(현재 로널드 레이건공항)을 출발해야 했다.

당시 23세로 중위였던 존 K.브레미어는 전달할 방법이 없어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며 “그녀는 내가 그녀를 떠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성조기는 1853년 일본 요코하마(橫浜) 앞바다에서 일본의 개방을 요구했던 매슈 C. 페리 제독(준장)의 미 해군 함대 ‘구로후네(黑船)’에 게양됐었다. 당시 미국의 주(州)를 나타내는 31개의 별은 불규칙하게 배열돼 있었고, 줄무늬에는 구멍이 났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져 천으로 뒷면을 보완한 채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다.

미국의 전설적인 해군 제독으로 ‘황소’라는 별명을 가진 윌리엄 F. 홀시가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에 사용하기 위해 이 성조기의 운송 특명을 내린 것이다. 당시로부터 92년 전 일본이 미국에 첫번째 굴복했고, 에도(江戶·도쿄)막부의 마지막을 알린 신호탄이 된 ‘구로후네’의 성조기를 일본의 항복을 공식화한 조인식에서 사용하도록 계획한 것이다.

Pacific War 75 Japan Surrender Q&A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東京)만 앞 미 해군 항공모함 미주리호에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오른쪽) 당시 일본 외무상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미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조인식 동영상은 시게마쓰 전 외무상이 “수년전 상하이(上海)에서 한국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1932년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그가 다리를 다쳐 평생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한 사실을 알린 것이다. 왼쪽은 연합군 총사령관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사진=AP=연합뉴스
불과 88년 전의 역사를 망각하고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도록 도발한 일본의 무모함에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이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무모함으로 10만여명의 미국인과 100만명이 훨씬 넘는 일본인이 희생됐다.

성조기를 우여곡절 끝에 조인식까지 운반한 브레미어 중위는 워싱턴 D.C.로 돌아와 그해 12월 여자친구 제인과 결혼했다. 제인은 라디오를 통해 항복 문서 조인식 소식을 접했고, 브레미어 중위가 그녀와의 데이트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갑자기’ 깨닫게 됐다고 WP는 전했다.

Pacific War 75 Japan Surrender Q&A
1945년 9월 12일 연합군 총사령관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 9월 2일 일본 도쿄(東京)만 앞 미 해군 항공모함 미주리호에서 거행된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서 서명을 하고 있다./사진=AP=연합뉴스
브레미어 중위는 제1차 세계대전 전투 중 독가스에 희생된 참전용사의 아들이었다. 1942년 미 해군이 색맹이면서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이 청년의 입대를 허용한 것은 그가 전몰용사의 아들인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 가족이 많은 것은 미국의 저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 중 하나다. 베트남전 영웅으로 2018년 8월 영면한 존 매케인 전 미 상원의원의 조부와 부친이 해군 제독이었다는 것이 최근 사례들 중 하나다. 아울러 존 켈리 전 백악관 비서실장의 차남인 로버트 켈리는 해병대 소총 소대장이던 2010년 11월 9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했다.

버나드 샴포 전 주한 미 8군 사령관은 부친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해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현재 한화테크윈의 항공·방산 부문 미국사업실장(부사장)이면서 미국 내 최대 한국 우호단체인 주한미군 전우회 부회장으로서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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