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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갈등에 대한 단상

[칼럼]갈등에 대한 단상

기사승인 2021. 03. 0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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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새 학기다. 방역지침에 따라 수강인원이 많은 대형 수업은 비대면으로, 실습수업 같은 소규모수업은 대면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오리엔테이션 기간에 강조했다. 백신의 원활한 보급으로 빠르게 일정 수준 이상의 국민에게 항체가 형성된다면, 전면 대면 수업도 기대해 볼 만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대비해야 함은 당연하겠다.

대면·비대면이던 수업 특성에 따라 조별 활동이 이뤄질 예정이다. 지난해 온라인에서 학생들은 훌륭하게 팀별 활동을 수행했다. 좌충우돌 여러 해프닝이 있기도 했지만 교수자로서 필자가 보기엔, 학생들은 다양한 매체와 툴을 이용해 소통에 적극적이었다. 물론 ‘조별 과제 잔혹사’도 여전했다. 학생들 간의 갈등은 온·오프라인에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팀 내 갈등으로 면담을 요청한 학생들이 있어 조정에 나선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학생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는데, 갈등은 건강하단 징표라는 점이다. 갈등이 없다는 것은 그 집단 내 누군가 희생한 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 뜻을 접고 의견을 포기하거나, 반대로 주장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자신에게 집중된 노동을 거부하지 못한 이도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 갈등을 기피한 이가 있기에 발생한 부작용들이다. 포기가 가져온 우울은 방법을 달리할 뿐 그 집단을 지배한다. 전염성이 있다는 말이다.

온전한 의미에서 갈등은 집단 내부에 강한 전자기력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저마다 스위치를 끄지 않고 자기 뜻이 반영되길 바라는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구성원들 각자에게 주체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팀 내부에 자연스럽게 리더가 누구인지 보인다. 때론 어떤 팀에선 앞에 나서진 않지만, 여론을 조성하는 2인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이를 농담조로 ‘실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더도, 숨은 권력 실세도, 성실한 조력자도, 묵묵히 제 일을 수행하는 일개미형도 각각의 역할 분담엔 그 배후가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남녀 성별에서 오는 신체적 차이가 기존의 젠더를 더욱 공고히 하고, 복학생 신입생의 구분엔 에이지즘(Ageism)이 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때론 주·부전공에 따라 성골·진골의 정통을 가르는 유치함이 어떤 힘보다 강한 인력과 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목도할 때도 있다.

현대의 인문학적 담론은 우리를 주체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기보다, 담화의 질서에 예속된 대상으로 파악한다. 그만큼 사회 구조가 복잡하고, 매체의 발달로 인해 고도로 매개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일 우리는 언론을 통해 각종 사회적 갈등 현상을 접한다. 이념 갈등 문제부터 젠더, 빈부, 세대, 노사, 진영 간에 벌어지는 갈등은 첨예해 보인다. 간혹 어떤 언론사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빅 데이터를 근거로, 짐짓 우리사회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미래세대를 걱정하기도 한다.

우리가 갈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체적일 때 가능한 일이다. 자칫 지금 지인들과 나누고 있는 갑론을박이 내 생각이 아닌 매체가 만들어낸 갈등이라면 우리는 ‘판단을 중지’하고 잠시 논란에서 비롯된 사회적 갈등을 멈출 필요가 있다. 특히 백신 접종을 갈등의 소재로 삼고 있는 이들이 도모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가 사회적 갈등 자체에 있다면 섬뜩하지 않은가.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주인공 최익현(최민식 분)은 자신이 작성한 수첩을 들고 ‘마! 여기 다 있어’라며 유세를 떤다. 흥미롭게도 영화 ‘범죄와의 전쟁’ 부제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이다. 갈등 담론을 무한 재생산하는 그들이 바로 나쁘다. 그들의 전성시대를 끝내야 할 때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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