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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팍스 베토비아나(Pax Beethoviana)

[칼럼]팍스 베토비아나(Pax Beethoviana)

기사승인 2021. 11. 1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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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베토비아나(Beethoviana)’. 이 낯선 단어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메인 테마곡 제목이다. 작곡가 웬디 카를로스 곡이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 삽입됐는데, ‘시계태엽 오렌지’의 배경이 되는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근미래의 암울한 분위기를 잘 담아낸 수작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베토벤의 것’쯤. 위대한 예술가 베토벤에 팍스 로마나를 원용하여 베토벤이라는 이름의 질서를 ‘반어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영화 내내 교향곡 9번의 2악장과 4악장이 반복적으로 울려 퍼진다. 그런데 인류의 공영과 연대를 노래한 합창 교향곡을 영화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방식은 매우 도발적이다 못해 불손(?)하기까지 하다. 영화를 보고난 후 따로 ‘시계태엽 오렌지’의 OST를 듣게 되면, 새삼 현재 유럽연합찬가이기도 한, ‘환희의 송가’가 무색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탠리 큐브릭은 원작의 맥락을 완전히 뒤틀어 각색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시계태엽 오렌지’만 하더라도 원작소설은 ‘개인의 폭력과 국가의 폭력 중 어떤 것이 더 두려운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원작자 앤서니 버지스는 악당 알렉스가 순응하는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가공할 국가의 폭력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소설 제목 역시 시계태엽 인간(오랑)을 오렌지로 표기한 언어의 유희다. 다시 말해 태엽을 감아주는 대로 작동하는 ‘순응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스탠리 큐브릭은 다른 선택을 시도한다. 교화 프로그램을 통해 뇌에 직접적인 화학적 거세를 당한 알렉스를 복귀시킨다. 극 중 실권자인 장관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자, 알렉스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도리어 마치 후계자라도 삼은 듯 언론플레이를 시도한다. 이와 같은 결말로 인해 영국에서는 오랜 기간 ‘시계태엽 오렌지’의 상영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어떤 결말이 더 옳은가를 묻는다면 말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큐브릭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의견을 물어온다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답하고 싶다. 감독은 이 영화의 결말을 통해 전체주의를 고발한다. 그와 같은 체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과 국가의 폭력을 비교해 국가의 폭력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 기득권체제를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큐브릭의 연출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다시 베토벤으로 돌아와, 교향곡 9번이 영화 배경에 흐를 때는 반드시 스피커가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커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조차 스피커를 연상케 한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알렉스가 우연히 조우한 무리는 방송국 직원들로 설정돼 있다. 그중 한 여인이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9번 교향곡 중 ‘환희의 송가’를 부른다. 스피커나 방송국 소속의 인물들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미디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시 본성의 악마성이 복원된 알렉스와 장관이 포즈를 취하고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을 때는 아예 대형 스피커를 좌우에 배치해 교향곡 9번을 그야말로 ‘때리며’ 막을 내린다. 섬뜩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큐브릭은 근미래에 도래할 수도 있는 전체주의 모델을 히틀러의 나치즘에서 찾은 듯싶다. 인류공영과 연대를 노래한 혁명주의자 베토벤조차도, 나치즘은 아리안의 영광을 위해 오염시켰다. 또한 그들은 ‘모든 지고한 가치를 부정했던’ 철학자 니체의 사상 역시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왜곡해 버렸다. 큐브릭은 이런 나치즘이 민주주의의 투표라는 제도로 탄생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나 보다.

감독은 알렉스라는 일탈을 일삼는 질풍노도의 반항아조차 기득권 카르텔의 낙점을 받으면 얼마든지 후계자로 지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어이 엔딩으로 장식했다. 이 점은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도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배후권력의 기획자들은 지금 거의 모든 스피커를 동원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작심한 듯싶다.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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