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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5> 망국(亡國)의 탄식 ‘황성옛터’

[대중가요의 아리랑] <5> 망국(亡國)의 탄식 ‘황성옛터’

기사승인 2022. 07. 3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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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대중가요의 시대를 연 '황성옛터'는 일제강점기 망국의 탄식이다.

유랑극단 연주자 전수린이 극단을 따라 만주를 거쳐 황해도 어느 여관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공연도 없었다. 창밖에 후줄근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며칠 전 악극단장인 왕평과 함께 둘러보았던 개성 만월대가 떠올랐다. 화려했던 옛 영화가 가뭇없이 사라진 고려 왕궁터에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들만 잡초 사이로 을씨년스럽게 흩어진 채 폐허로 전락해 있었다.

시린 달빛에 젖은 황성(荒城) 옛터는 인적이 끊겨 풀벌레 소리가 적막할 따름이었다. 그지없는 황량한 정취에 쓸쓸한 감회가 북받쳐 올랐다. 그것은 나라 잃은 겨레의 아픔으로 승화되며 가슴속 빗물로 흘러내렸다.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정처 없는 나그네의 심사를 껴안은 여관방 안에 감미로운 애수를 머금은 구슬픈 선율이 스며들었다. 대중가요 '황성옛터'는 그렇게 탄생했다.

전수린은 악상을 다시 가다듬어 오선지에 옮겼고 왕평이 곡의 슬픈 감성와 정한을 고스란히 살린 가사를 붙였다. '황성옛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8년 가을 가수 이애리수가 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극단 취성좌의 공연 중 막간에 노래를 부르면서였다. 애조 띤 가락으로 풀어내는 청순한 여가수의 처연한 목소리는 나라와 고향 잃은 대중의 비애감을 고취시키며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관객들의 흐느낌이 곡성으로 변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목이 메어 울었다. 연극보다 노래가 인기를 끌며 극장은 늘 만원이었다. 일경이 출동해 노래를 중단시켰는가 하면 전수린과 왕평이 종로경찰서로 붙들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황성옛터'는 금지곡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시대의 절망적인 상황을 옛 왕궁터의 폐허에 빗댄 가사와 슬픈 곡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32년 빅터레코드사가 노래를 발표하자 SP판 5만장이 판매되었을 만큼 히트를 했다.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민족의 울분을 노래가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곡명은 '황성(荒城)의 적(跡)'이었는데 이듬해 '황성옛터'로 바꿨다. 노래가 지닌 허무주의적 패배감과 민족적 좌절감이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애국적 맥박으로 승화되면서 '황성옛터'는 민족가요로 거듭났다.

막간 가수로 활동하다가 '황성옛터'를 불러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이애리수의 삶도 노래를 닮았다.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남자 쪽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동반자살을 꾀하는 풍파 끝에 모든 연예활동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했다. 그리고 2009년 9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이애리수에게 '황성옛터' 또한 한때의 영화를 간직한 덧없는 꿈의 노래였을까.

당대의 유행가 열풍을 주도한 '황성옛터'는 광복 후에도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남았다.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며 노래의 생명력을 유지했다. '황성옛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좋아했던 노래이기도 했다. 인생도 권력도 무상할 따름이다. 세월과 시절에 속절없이 체념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나그네의 삶이 있는 한 '황성옛터'의 신파적 비극미 또한 시나브로 우리 주변을 맴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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