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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그 눈빛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

[칼럼]그 눈빛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

기사승인 2022. 11. 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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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에둘러 말할 수 없기에, 이 글은 두괄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와 우리 주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의 한복판, 용산구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는 앞날이 창창한 미래세대를 잃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현재 대한민국은 상중(喪中)이며, 상주(喪主)는 국민이다.

이번 학기 백여 명의 수강생이 참여하는 대형 강의에서, 주변에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안부를 물으니, 이내 쪽지가 왔다. 학생 세 명이 지인의 죽음을 알려왔다. 할 말을 잃고 틀에 박힌 위로의 답장을 남겼을 뿐,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연구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평소 존경하던 다른 학과의 선생님을 만났는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희생자 중에 졸업생이 있어 빈소에 다녀왔다고 한다. 일반적인 행사나 모임이라면 반갑게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눴을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먹먹한 심정으로 영정을 지키셨던 것 같다. 막 사회에 진출한 졸업생과 그 친구들을 장례식장에서 보게 된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슬픔 그 이상의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참사가 벌어진 순간에 온 국민이 미디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희생자들의 죽음을 목도했다. 살려달라고 애타게 손짓하는 청춘들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하물며 구조를 돕던, 희생자들과 비슷한 또래의 시민들과 현장 경찰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살려내려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그들의 마지막 눈빛을 보았을 터이다.

그 눈빛은 우리를 아이러니에 빠지게 한다. 참사 당시 숨이 조여드는 공포감 속에서 꺼져가는 삶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은 우리를 목격자에서 방관자로 만든다.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모순된 존재가 된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가족과 친구를 잃은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지점이다.

사실, 일상에서 가족을 떠나보내는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가족을 잃었다는 측면에서 피해당사자이지만 그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슬픔에 빠진다. 빈소에 영정사진을 올려놓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사진 속 얼굴, 그 눈빛을 보며 '살아생전에 좀 더 잘할 것을…'이라며 아쉬워하고 한편으론 죄스러운 마음에 깊이 애도한다. 우리가 빈소에서 고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참사를 공감과 이입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그 무엇보다도 애도 기간에 전국에 마련된 분향소에 희생자의 영정사진은커녕 그 이름조차 걸어놓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거리 축제를 즐길 줄 알고, 타인과 삶을 공유할 줄 알았던, 멋스러운 건강한 미래로서 156명의 고귀한 청년들을 잃었다. 유족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걸고 참사 이유가 밝혀질 때까지 애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 그 아름답고 처연한 눈빛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다.

아울러 참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모든 개연성을 따져 보아야 한다. 특히 정부 당국은 행여 의도치 않은 시도가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참사를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사태 수습에 있어 참회의 마음으로 임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국민은 저항할 것이다.

이 글은 미괄식이 될 수 없다. 2022년 10월 29일에 발생한 참사는 국민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고 동시에 방관자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글을 끝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방관이라는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서 애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희생자들의 유족과 함께 상주로서 마땅히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지금은 애도를 끝낼 때가 아니다. 애도와 함께 따져 물어야 할 때다. 애도는 진상이 규명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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