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강성학 칼럼] 21세기 중국의 해양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강성학 칼럼] 21세기 중국의 해양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22. 11. 30. 17:49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바다를 지배하는 자는 자유롭다. 그는 자기의 의지대로 전쟁을 많이 혹은 적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영국의 근대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말이었다. 약 200년후 미국의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은 바다를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해군장교와 역사가로서 그리고 전략가로서 그의 교리들은 세계의 모든 주요 해양국가들에 의해 채택되고 실천되었다.

마한은 미(美)해군대학에서 행한 수년간의 강의내용들을 수정하고 정리하여 1890년과 1892년 <역사에 미친 해양력의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이라는 그의 첫 주요저작의 출판으로 거의 즉각적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한니발(Hannibal)이 기나긴 육로 대신에 로마인들이 종종 아프리카를 그랬던 것처럼 바다를 통해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역사가 달라졌을까?"라는 의문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책과 그 후 그의 저서와 에세이 등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초까지 해군 전략가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했던 3개의 '마한의 도그마(Mahanian dogmas)'를 제시했다. 그것들은 '전함의 우상화', '집중의 철의 법칙', 그리고 한번의 '결정적 전투에서 적 함대의 격멸'이었다.

마한의 책 출간 타이밍은 절묘했다. 당시 산업화와 기술적 변화로 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함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국가 간 경쟁과 제국적 야심은 해군의 군비경쟁을 촉발시켰다. 세계는 해양력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한의 인정은 빨랐고 지구적이었다. 그의 책 리뷰는 환호 일색이었고 또 찬양하는 편지들이 전 세계에서 쏟아졌다. 그 책과 그의 후속 작품들은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스페인어로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2년 후에 마한은 해양력에 관해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칭송되었다. 프랑스에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용했고, 영국에선 해군의 모든 장교들이 그 책을 읽거나 읽은 척을 했다.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수상은 그것을 '세기의 책'이라고 명명했다. 1894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두 대학교는 마한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독일의 빌헬름(Wilhelm)황제는 자신의 해군장관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에게 그 책의 번역서를 독일 해군의 모든 배에 비치하여 모든 장교들이 그것을 읽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어떤 국가에서도 마한의 저작들이 일본에서만큼 깊고 지속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1894년 그 책이 번역되어 일본제국의 해군 및 육군 참모대학들을 통해 배포되었다. 일본 해군참모대학은 마한을 그곳의 교수로 초빙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마한의 '결정적 전투'의 교리는 한방에 완전히 몰두하라고 촉구한 16세기 일본의 위대한 사무라이 철학자 겸 검객이었던 미야모토 무사시(Miyamoto Musashi)를 상기시켰다. 일본이 동양의 트래팔가 해전에 빗대는 쓰시마 해전의 영웅인 하이하치로 도고(Heihachiro Togo)제독은 "모든 국가의 해군 전략가들은 마한의 작품이 군사학의 공부에서 범세계적 권위로서 영원히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이 한결같은 의견"이라는 헌사를 썼다.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선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그를 찬양하는 리뷰를 썼고 미국이 새로운 육중한 전함의 함대를 건설해야 한다는 마한의 결론에 특별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마한과 루스벨트의 파트너십은 1897~1898년 루스벨트가 해군의 차관보로 재임하는 동안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신속한 미국의 승리를 가져온 함대의 전개를 함께 계획했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 시(1901~1909)에 마한은 루스벨트의 가까운 보좌관으로 봉사했으며 대통령은 때때로 마한의 에세이에서 문단을 가져와 자신의 연설에서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요컨대 미국을 비롯해 유럽 강대국들과 일본제국까지도 19세기 말에 그들은 모두가 마한주의자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세기도 더 지난 21세기에 마치 격세유전적인 현상처럼 중국이 갑자기 마한주의자(Mahanian)를 자처하고 나섰다. 시작은 1985년 6월 덩샤오핑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확대회의를 주재하면서 가까운 미래에 세계대전은 없을 것이니 전면전에 대비하는 대신에 제한적 지역갈등에 대한 대비로 전환해야 한다는 천명이었다. 그런 전략적 전환은 군부의 재조직과 100만 병력의 축소를 가져왔다. 그 대신에 20%의 해군 예산을 증강시켰다. 그리고 1988년 중국은 대양해군(the Blue Water Navy)을 건설할 50년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다 곧 냉전종식과 북방의 최대위협인 소련제국의 붕괴를 목격한 뒤 중국은 해군력 증강에 집중했다.

중국이 마침내 공개적으로 21세기의 마한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항공모함의 구축을 포함한 해군력 증강에 매진하면서 동중국과 남중국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시대착오적 제국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바다의 황제'인 미국과 심각한 갈등과 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해군력의 집중적 증강에 매진하면서도 마한의 전략적 교리를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100년 이상 철저한 마한주의자이며 1941~1945년 동안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치른 미국은 클라우제비츠의 전략적 원칙들을 해전에 그대로 적용, 집중하여 정면공격이라는 직접 접근법의 전략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해양 전략에서도 지상전에서처럼 마치 바둑을 두듯 상대방의 취약한 곳을 공략해 나가는 중국의 전략적 문화의 전통인 간접접근법을 채택할 것이다. 이것은 기나긴 소모전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국가인 미국은 중국과의 장기적 소모전에 결코 말려들지 않으려 할 것이다. 반면에 1949년 중국공산당 집권 이후 단 한 번의 해전 경험이 없는 완전 아마추어인 중국이 오직 폭군 시진핑의 권력욕에 사로잡혀 일종의 번지점프를 하듯이 무모하게 미국에 무력도발을 결행한다면 중국의 해군은 거의 다 섬멸되고 다시 과거의 고립된 대륙국으로 퇴락할 것이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