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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3> 분단의 아픔 ‘가거라 삼팔선’

[대중가요의 아리랑] <23> 분단의 아픔 ‘가거라 삼팔선’

기사승인 2023. 01. 0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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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 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아~ 꽃 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눈 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던 고갯길/ 산새도 너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인수가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토로한 '가거라 삼팔선'은 국토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그린 서러운 절창이다. 1947년부터 울려퍼진 '가거라 삼팔선'은 광복의 환희가 가시기도 전에 민족사의 현실로 들이닥친 남북 대치의 비극을 표현한 노래이다. 다 같은 조국땅이건만 삼팔선이 가로막혀 남과 북을 오가지도 못하는 통한의 곡성이다.

남북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소(美·蘇) 강대국의 패권 다툼으로 파생된 민족의 비극이었다. 해방의 기쁨도 채 누리기 전에 국토의 허리는 갈라지고 온 산하에 전운(戰雲)이 드리워졌다. 돌이켜 보면 '가거라 삼팔선'은 2년 후 발발할 전쟁의 섬뜩한 예광탄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단의 모순이 폭발하기 이전에 대중가요는 엄청난 전란의 징후를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팔선은 한(恨)의 모닥불이었다. 비극의 단초였다. 전쟁의 도화선이었다. 노랫말은 이를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 리 길'이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마주한 시대의 풍경과 정서를 고스란히 그려내며 대중과 공감하는 유행가의 위대성이다. 1947년 당시 경향신문 등 언론 보도 또한 '삼팔선이 깨져야 진짜 독립이 되는 것'이라는 국민의 목소리를 전하며 삼팔선에 대한 서민대중의 인식을 반영했다.

국토가 삼팔선으로 가로막힌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노래는 남북민이 모두 애창했다. 그러나 남북에서 모두 금지되거나 시련을 겪었다. 북에서는 1948년 9월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전면 금지되었다. 남한에서는 1절 마지막 소절 '삼팔선을 헤맨다'가 논란이 되었다. '월북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가사를 바꾸라는 권고에 작사가 이부풍이 이를 거부하며 잠적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작사가 반야월이 나서 '삼팔선을 탄한다'로 바꾸며 사태를 무마했다. 2절 가사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는 부분 또한 문학성보다는 반공적 성격이 보완된 것이라는 느낌을 간파할 수 있다.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정국에서 나라의 운명은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남북을 아우르는 자주독립 국가 건설에 대한 민족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분단은 기어이 현실화되었다.

삼팔선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기로 한 임시적이고 편의적 경계였다. 그런데 전쟁과 휴전을 거치면서 '철의 장벽'으로 굳어지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이 비탄의 갈림길이 생겨난 시대적인 비련을 이부풍이 가사로 엮고 박시춘이 곡을 붙여 남인수가 부른 노래가 '가거라 삼팔선'이다. 강요된 분단이 초래한 국민의 좌절과 아픔을 잘 대변한 가요이다.

'가거라 삼팔선'은 해방 후 발표한 남인수의 첫 곡이었다. 어느덧 노래가 유행한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남북의 적대는 물론 동서와 좌우로 갈라져 싸우며 서로 적폐로 내몰면서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삼팔선(휴전선)은 여전히 분단국가인 우리 민족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 노래 또한 겨레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피멍으로, 그칠 수 없는 신음으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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