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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30> 실향의 탄식 ‘꿈에 본 내 고향’

[대중가요의 아리랑] <30> 실향의 탄식 ‘꿈에 본 내 고향’

기사승인 2023. 02. 2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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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 타관땅 돌고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고향초'가 남쪽의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라면 '꿈에 본 내 고향'은 북녘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사향곡(思鄕曲)이다.

노래를 부른 가수 한정무 또한 1·4후퇴 때 북쪽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월남한 실향민이었다. 그래서 타향을 떠도는 신세의 탄식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는 정한이 더욱 짙게 배어있다. 박두환이 노랫말을 쓰고 김기태가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이미 일제강점기 말경에 악극단 무대를 통해 알려졌고, 한국전쟁기 부산 피란시절에도 극단가수들이 종종 부르며 고향 잃은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던 가요였다.

피란민으로 초만원이던 부산의 뒷골목 선술집에는 전쟁의 혼란과 망향의 눈물로 얼룩진 사람들이 젓가락 장단에 맞춰 '꿈에 본 내 고향'을 울먹이며 함께 부르곤 했다. 명실공히 대중가요로 국민적 인기를 모은 것은 부산에서 도미도레코드를 어렵게 운영하던 가수이자 작곡가인 한복남이 음반으로 제작 발표하면서이다. 한복남 또한 한정무와 더불어 북녘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이었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무정한 세월만 보내다가 기어이 노쇠한 심신을 이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실향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2022년 타계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도 월남한 실향민으로 늘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KBS 가요무대에서 '꿈에 본 내 고향'을 자주 불렀다. 망향가를 부르던 한정무도 노래를 취입한 지 10년도 못 되어 영원한 실향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밤하늘에 뜬 둥근달을 바라보며 휴전선을 한탄하던 한정무는 결국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1960년 추운 겨울, 서울에 부인과 3남매를 남겨둔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의 나이 고작 40대 초반이었다. 술을 즐기는 호인이었던 그의 유해가 망우리공동묘지로 향하던 날 동료 연예인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홀연히 떠나다니…"라며 목메어 울었다고 한다.

한정무의 처음이자 마지막 망향가가 되어버린 '꿈에 본 내 고향'은 그렇게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래서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남북 분단의 비극으로 파생된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유랑생활의 서러움까지 소환하며 울림을 더했다. 고향을 두고 떠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서 객지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댐 건설로 인한 수몰민들의 망향가이기도 했다.

실향민들의 피란살이는 하루하루가 고달픈 일상이었다. 타향 객지에서의 삶이 외롭고 힘들수록 고향은 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법이다. 그래서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곳이 고향이다. 여우의 수구초심처럼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고향은 늘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세월이 흘러도 회귀의식(回歸意識)을 버릴 수 없었던 월남 실향민과 탈북 실향민들도 그랬을 것이다.

역사상 숱한 내우외환으로 인한 실향과 이산의 아픔이 켜켜이 쌓인 우리 한국인처럼 망향의식이 가슴 깊이 자리한 민족도 드물 것이다. '꿈에 본 내 고향'은 1950년대 전쟁기에는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과 전란에 지친 대중을 위로했다. 그 후에는 해외에 나가있던 근로자들과 월남전에 파병된 장병들 그리고 고국을 떠나있는 이민자들에게도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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