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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일외교의 신뢰성은 회복될 수 있을까?

[칼럼] 한일외교의 신뢰성은 회복될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23. 03. 0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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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국가 간의 관계는 모든 다른 사회관계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발생한다.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국가 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전쟁과 평화의 대안들이다." 이것은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인정되는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그의 기념비적 저작인 <평화와 전쟁>(Peace and War)에서 했던 말이다. 이때 국가를 상징하는 에이전트는 외교관과 군인이다. 군인은 외교관이 실패했을 때 자신의 임무수행에 나선다.

1604년 영국의 헨리 우튼 경(Sir Henry Wooten)은 "외교관이란 자신의 조국을 위해 해외에서 거짓말을 하도록 파견되는 정직한 인간"이라고 숨겨진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그의 외교관 경력은 종말을 맞았다. 이처럼 외교관이란 언제나 신뢰성(credibility)의 문제를 안고 있다. 16세기의 외교 이론가들에 의하면 최초의 외교관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국가의 일반 대중들의 마음속에서 외교관이란 결코 천사(angel)로 인식되지 않는다. 어쩌면 불공평하게도 천사와 정반대의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상은 외교관 개인의 인격적 자질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외국과의 협력적 기간 동안에도 외교관은 자국의 수직적 명령계통 속에서 외국과 협력적 관계에 깃들여 있는 공동목적보다는 각자 자국의 정부를 위해 일한다. 전시에 단결에 대한 당연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에 미국, 영국, 소련 간의 동맹을 괴롭힌 긴장은 바로 그들 사이에서 이러한 테마의 극적인 예가 될 것이다. 결국 1945년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도 미소 간의 그런 외교적 불신의 결과였다. 이처럼 외교관의 지배적 가정은 통일이 아니라 분할이다. 이런 외교의 불성실과 교활함에 대해 드골 장군이 외교관들이 국가들의 협력을 위한 지속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헌신적인 동반자라기보다는 조작을 위한 대상으로서 서로를 간주하는 "냉혈적 괴물들"이라고 개탄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여기에 외교관은 그의 세련된 매력이 감추지 못하는 냉소적 음모자로서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외교관은 외교관계의 네트워크가 비밀 첩보원이나 비밀활동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체계 속에서 활동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엇보다도 외교의 비밀성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속임수의 개연성과 결합되어 외교와 외교관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동의에 입각한 민주정부의 전제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모르는 비밀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외교의 비밀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국민에게 외교적 비밀을 공개한다면 그것은 적국들에게 국가의 기밀을 노출시키게 된다고 반박한다. 그럴 경우 그 국가는 상대방이 자국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협상에서 그만큼 상대방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공개협상은 협상에 임하는 외교관의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의 경직성을 낳게 된다. 이런 경우에 구속력이 없는 탐색적 토론이나 은밀하게 상대방을 떠보는 절차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적대감의 해소에 유용하고 때로는 불가결한 시험적인 기술들이 효율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국내의 일반대중과 언론은 외교관의 실질적인 입장과 외교적 연기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은 아직도 외교적 비밀의 지속적 정당성이 옹호되고 있다.

비밀성은 상호 간에 오랜 의심과 두려움의 변증법에 의해서 생겨나고 유지된다. 따라서 이런 유감스러운 변증법이 지속되는 한 국가관계에서 비밀성의 제거를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비밀은 속임수와의 연계성으로 하나의 악덕행위(vice)로 간주되지만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악인 적국이 존재하는 한 필요악이다. 이뿐만 아니라 전통적 외교의 본질을 변질시킨 또 다른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윈스턴 처칠 영국수상이 최초로 개발한 정상외교(summit diplomacy)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1970년대에 실천한 소위 왕복외교(shuttle diplomacy)이다. 이것들은 번거롭고 지루한 전통적 외교과정에 대한 하나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안이지만 여전히 외교의 연장이다. 오늘날 통신 기술발전과 이런 대안들이 외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중요성을 실제로 크게 감소시켰다지만 그러나 국가 간의 정상적이고 또 일상적인 관계의 대부분은 여전히 전통적 외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대의 최고 외교 이론가인 해롤드 니콜슨 경(Sir Harold Nicholson)은 외교관의 제1차적 덕목으로 정직성(truthfulness)을 지적했다. 그리고 현대 민주국가의 대중들은 공개외교를 요구한다. 이런 외교관의 진실성과 공개외교 형식의 불가피성은 오늘날 많은 국가관계에서 외교의 교착상태를 가져왔다. 한일관계가 대표적인 본보기가 될 것이다. 특히 지난 5년간 문재인 정권하에서 한일관계는 양국이 미국의 주니어 동맹파트너가 아니었다면 외교관 대신에 군인이 나섰을 지도 모르는 최악의 관계였다. 그런 상황의 주된 원인은 문재인 정부가 뜬금없이 국내적으로 역사적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선전 선동의 대일 적대적 자세를 고취해 국가적 신뢰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은 한국인들의 대북 적대감을 대일 적대감으로 돌리기 위해서 문재인 좌파 종북 정권이 일본에서 일종의 희생양(scapegoat)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모험주의적 작태를 벌린 것이다. 이제 문재인 정권은 사라졌지만 그가 부추기고 이용했던 반일감정의 잔재는 남아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작금의 동북아 국제정세의 긴장이 심각하게 고조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의 동맹국인 한일 간 비적대적이고, 아니, 우호적인 외교관계의 회복은 군사 전략적으로 아주 긴요한 문제에 속한다. 모두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피할 수 없는 국내의 일부 여론의 반발과 대중적 저항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내정치적 이유로 겁을 먹고 여론과 대중을 추종만 한다면 그들은 지도자 본연의 사명인 지도력(leadership)을 방기하는 것이다. 역사는 그들에게 계속 망설이다가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에 대해 후에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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