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대중가요의 아리랑] <32> 1·4후퇴 피란민의 비애 ‘굳세어라 금순아’

[대중가요의 아리랑] <32> 1·4후퇴 피란민의 비애 ‘굳세어라 금순아’

기사승인 2023. 03. 12. 17:5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1·4후퇴 실향민과 피란민의 비애를 담은 주제가였다.

1절은 흥남부두를 떠나는 피란민들의 실향과 이산(離散)의 아픔을 노래했고, 2절은 부산에서의 고단한 피란생활과 망향의식을 그렸다. 노랫말 속의 금순이는 전쟁의 혼란 속에 잃어버린 누이의 상징이다. 나아가 가족과 헤어진 채 홀로 모진 세파를 헤쳐나온 억척스러운 1950·1960년대 여성의 표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면서 가족을 애타게 찾고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랬을까.

'굳세어라 금순아'의 공간적인 무대는 흥남과 부산이지만, 노래의 탄생지는 대구이다. 1·4후퇴로 대구에는 다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1951년 여름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강사랑은 대구 양키시장에 군용 천막으로 지은 강산면옥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걸음이었다. 마침 거리를 지나는 피란민들의 지친 행색을 보고 불현듯 악상이 떠올랐고 즉석에서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수 현인을 자유극장 옆 남성악기 2층 다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 다방 한 구석에 군용 담요를 여러 겹 얼기설기 엮어 방음장치를 해둔 오리엔트레코드사 녹음실이 있었다. 한국전쟁기 불멸의 히트곡 '굳세어라 금순아'는 그렇게 탄생했다. 노래는 대구에서 나왔지만 전 국민의 가슴속에 더 깊게 자리한 것은 실향민의 망향교(望鄕橋)이자 이산가족 상봉의 성지(聖地)였던 부산 영도다리였다.

노랫말 속의 부산 '국제시장'은 2014년 개봉 영화의 제목으로 등장하며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상처를 환기시켰다. 영화 '국제시장'은 흥남철수와 생이별, 부산 피란생활의 고달픔, 파독 광부와 월남전 참전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이르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격변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서사적 구조를 원용해 민족의 비극을 그린 것이었다.

이병주 선생이 1947년 대구에서 설립한 오리엔트레코드사는 피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다. 전쟁시절 우리 대중가요의 산실이었다. 오리엔트레코드사는 격동의 해방정국에서도 콩쿠르를 개최해 신인 가수들을 발굴했으며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피란 온 가요인들과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는 물론 '신라의 달밤' '비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등 주옥같은 명곡을 만들어낸 대중가요의 메카였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1950년 12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국군과 유엔군의 흥남 철수작전이 잉태한 노래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세가 다시 역전되면서 해상 철수작전이 진행된 흥남부두는 군인과 피란민이 뒤엉켜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연출했다. 그 와중에 어린 금순이는 가족의 손을 놓치고 만다. 부산 영도다리에 보름달이 뜨면 만나자고 한 약속은 33년 후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서야 이루어진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실향의 아픔과 피란의 설움을 담았지만 리듬은 경쾌하게 풀어냈다. 전란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온 민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한 것이다. 통일의 그날까지, 다시 만날 그날까지, 굳세게 살아가자는 다짐의 반영이었다. 우리 민족의 감성은 이 같은 상실과 고통과 가난과 연민의 긴 터널 속에서도 금순이를 버리지 않았다. 금순이는 고향 잃은 사람과 이산가족의 대명사였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