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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노란비명’ 그리기

[데스크칼럼] ‘노란비명’ 그리기

기사승인 2023. 10. 1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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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문화부장
"꺅!" "큭큭큭~". 어두운 전시실 안.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비명에 관람객들은 억지로 참았던 웃음을 희미하게 내뱉는다. 김범 작가의 ''노란비명' 그리기'(2012)를 감상하는 풍경은 괴이한 비명과 고도로 압축된 웃음의 연속이다.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김범 작가의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이 열리고 있다. 국내 개인전은 2010년 이후 13년만이다. 김범은 설치, 영상, 회화, 드로잉, 조각, 책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상의 이미지를 뒤집는 작업을 해온 미술가다. 대중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앞 다퉈 작품 소장에 나서는 '인기' 작가다. 1990년대 초기작부터 2016년에 이르는 70여 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에도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과 홍콩 엠플러스 미술관 등에서 빌려온 작품들이 포함됐단다.

''노란비명' 그리기'는 미국 공영방송 PBS의 장수프로그램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를 패러디한 듀토리얼 작품이다. 영상 속 강사가 화가 밥 로스처럼 노란색 선으로 된 추상화를 그리는 법을 단계별로 설명한다. EBS를 통해 국내에도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밥 로스가 그림을 완성하고 "어때요. 참 쉽죠?"라고 말하는 모습이 잘 알려졌다.

김범의 작품을 보면 처음에는 "어이없네" 싶다가도 곱씹으면 "그렇지"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를들어 대표적인 설치작품 '교육된 사물들' 연작 가운데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2010),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은 "너는 새"라고 끊임 업이 강요받는, 정지용의 시를 계속해서 듣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돌을 통해 교육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그럼 비명은 어떻게 그림이 될까. ''노란비명' 그리기'의 영상 속 강사는 노란색 선을 그으며 마치 선에 비명을 불어넣듯 가까이 입을 대고 '끼야아아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연이어 짜증, 공포, 슬픔, 희열 등 감정에 어울리는 "으어어!" "아아아!" "꽥!" 같은 다양한 비명이 등장한다. 소리의 높낮이, 길이에 따라 노란색의 채도와 선의 길이가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캔버스를 꽉 채운 강사는 마지막에 밥 로스처럼 "어때요. 참 쉽죠?" 한다. 반색하며 그림을 그리는 능청스러운 강사의 연기와 웃음을 억누르는 관람객들의 인내가 지금도 생생하다.

완성된 '노란비명'은 전시실 입구에 실제로 걸려있다. 비명이 그림이 된 작품은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 그리기가 강사의 말처럼 결코 쉽지 않다는 역설이 느껴진다. 비단 그림뿐일까. 오선지의 음표 하나하나에, 소설의 한 단락, 한 글자마다에 창작자의 고뇌, 아픔, 환희, 슬픔이 집약된 '비명' 오롯이 깃들어 있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는 국내 대형 포털의 생성형 AI(인공지능) 학습에 이용되는 콘텐츠의 무단 이용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저작자의 동의 여부가 결여됐다는 얘기다. AI가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저작자, 창작자의 '비명'을 기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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