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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보가 출연한 '카밀라' '마타 하리' '그랜드 호텔' 등의 영화보다 그녀를 더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삶의 궤적이다. 그녀는 인기 절정이던 36세에 전격적으로 은퇴해 다시는 영화판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공식적인 인터뷰나 자서전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며 죽는 날까지 책, 그림, 산책을 즐기며 고독하게 살았다. 이런 삶이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대중의 요구와 할리우드 시스템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중과의 관계와 거리, 예술가의 자존심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녀는 자기 삶과 이미지를 통제하며 자기 한계와 경계를 분명히 했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여성의 주체성과 자기 결정권을 상징하는 모델이었고, 한 시대를 풍미한 명배우를 넘어 문화적 상징이 됐다. 앤디 워홀은 그녀의 얼굴을 팝아트로 제작하기도 했다.
27년간 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른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정책을 끝내고 대통령이 됐지만, 한 번만 하고 물러났다. 그 이후 그는 국가 원로와 세계평화의 상징으로 살았다. 그는 평화로운 권력 이양의 세계적 모범이 됐다. 그는 "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유를 위해 싸웠다"라고 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친구를 가까이하라, 경쟁자는 더 가까이하라. 포기도 지도력이다."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 나오는 이 말은 지금 우리 정치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뉴욕 타임스가 만델라에게 "그렇게 끔찍한 고통을 겪은 뒤에 어떻게 증오심을 극복할 수 있었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분개는 자기가 독약을 마시고 그 독약이 적들을 죽여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증오는 마음을 짓누르며 전략에 방해가 된다. 지도자는 증오를 담아둘 여유가 없다"라고 답했다. 가르보나 만델라가 은퇴 후 더 사랑받으며 전설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인기나 권력 이상의 큰 가치를 깨닫고, 품위 있는 퇴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도 나가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판단해 떠났고, 끝까지 자기가 정한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대중들의 뇌리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만개한 벚꽃이 꽃비를 흩날리던 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서이다. 주식 중개인으로 안정된 삶을 살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왜 가족조차 버리고 홀연히 집을 떠났을까. 사람들은 그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프랑스 파리로 갔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를 찾아온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이 작품엔 문단과 사교계의 속물들, 잘 팔리는 그림만 그리는 화가 등 세속적 처세에 밝은 타락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는 내면이 요구하는 대로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열망을 실천했다. 가족이 생각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난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라고 태연히 답한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만 생각하는 그 무책임한 발언이 한없이 부럽기도 하다. 보통 사람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인물을 통해 대리 만족하면서 지는 꽃잎이나 흘러가는 구름, 달과 별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이다. '달과 6펜스'에서 달은 내가 꿈꾸며 추구하고 싶은 이상이고, 6펜스는 물질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떨어진 푼돈 6펜스를 찾느라 하늘에 뜬 달을 보지 못하고 산다. 우리는 달을 갈망하지만, 죽는 날까지 여전히 6펜스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가끔 달과 별을 봐야 오늘을 견딜 수 있다.
다 버리고 떠나기란 어렵다. 전설이 된 인물같이 폼 나게 떠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는 없어도, 잠시 일탈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의 허무함을 가장 화려하게 상징하는 벚꽃은 이미 졌다. 어수선한 세상사는 그냥 두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길을 나서보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논두렁길을 걸어보고 아직 남은 사월의 라일락 향기에 흠뻑 취해보자. 연둣빛 잎새들과 꽃들의 아우성에도 귀 기울여 보자.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