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화민족이란 모순 형용
오늘날 지구 위에 살아가는 80억명 넘는 호모사피엔스 중에서 거의 다섯 명 중 한 명은 소위 중화민족(中華民族)에 속한다. 중국공산당에 따르면, 중화민족이란 현재 중국 인구의 91~92%에 달한다는 한족(漢族)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한족뿐만 아니라 티베트족, 위구르족, 조선족, 먀오족, 만주족 등 56개 각족(各族) 민족 모두가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중국 밖에서 살아가는 5000만~6000만명에 달하는 화교 인구 역시 중화민족에 들어간다.
이쯤 되면 중화민족은 일반적인 민족의 개념을 벗어나는 제국의 시민권과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근대 초기 유럽에서 생겨난 민족(nation)이란 개념을 고의로 바꿔서 어떤 종족이든 중국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가 중화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쳐 왔다. 비근한 예로 당·정·군 모든 권력을 장악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 시진핑 총서기는 2013년 집권 이래 늘상 '중국몽'을 부르짖어 왔는데, 그는 여러 차례 스스로 중국몽을 정의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 역설했다.
중화민족을 부르짖는 시진핑의 민족주의는 일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중국 특색의 민족주의다.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받거나 해외에 살아도 중국계에 속하는 모든 호모사피엔스는 중화민족이라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지만, 지구인의 역사에서 언어는 주술적 마력을 발휘한다.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중화민족이란 개념은 용광로의 흡입력으로 중국에 살아가는 56개 민족을 빨아들인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시진핑은 틈만 나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부르짖는다. 중화민족이란 모순 형용은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어다. 중국의 비밀을 밝히지 않고선 세계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다.
|
중화민족의 비밀을 밝히려면 제일 먼저 중화 문명의 연원을 둘러싼 고전적 논쟁에서 시작함이 슬기로울 듯하다. 그 고전적 논쟁은 두 개의 근본적 물음을 끼고 전개되어 왔다. 첫째, 중화 문명은 외부와의 접촉이 끊긴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난 고립적 문명인가, 아니면 중국 역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앞선 선진 문명을 흡수한 결과 비로소 문명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는가? 둘째, 중화 문명은 하나의 기원으로 소급되는 단일한 문명인가, 아니면 여러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하던 다양한 문화가 합쳐진 다원적 문명인가? 둘 다 중화 문명의 기원에 관한 큰 질문임으로 우선 첫째 질문만 다뤄보자. 먼 외계에서 지구인의 세계사를 깊이 탐구하는 미도가 물었다. "인더스강 유역에서 태동한 하라파 문명이 원거리 교역을 통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지요.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또한 활발한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고요. 그런데 학자들은 고대 4대 문명 중에서 유독 황하 문명만이 나머지 세 문명과는 단절된 채로 북중국 중원(中原)에서 독자적으로 발흥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황하 문명과 다른 문명과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러한 학계의 일반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진 않습니다. 황하 문명은 나머지 세 문명보다 1500년에서 2000년 정도 늦게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파 사람들이 땅길과 바닷길을 열어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진출했는데, 히말라야산맥과 고비사막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해도 물적, 인적 교류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미도가 던진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중화 문명의 고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지리를 보면 그 거대한 대륙이 사방으로 방대한 면적의 장애에 막혀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중국의 남서쪽엔 히말라야산맥과 티베트고원이, 북쪽으로 고비사막이, 서쪽으로 타클라마칸사막이, 동쪽으론 태평양이 놓여 있다. 현재 국경이 닿아 있는 인도와 교류하기 위해서도 히말라야산맥을 넘거나 바닷길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태고로부터 중화대륙은 거대한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고, 중원에 태동한 고대 문명은 외부와의 교류 없이 생겨난 자생적이며 독자적인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독자적 문명이 생겨날 수 있었던 이유는 외부의 선진 문물이 유입됐기 때문이 아니라 비옥한 황하 유역에서 자생적으로 농경이 꽃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비단길과 바닷길이 개척되어 중국이 외부와 활발한 교역을 시작한 시기는 중국 땅에 통일제국이 생겨난 이후였다. 바로 그 점에서 중국 학자들은 활달한 문명의 결과 외부와의 교역이 일어났지, 외부와의 교역 결과 문명이 발생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
중화 문명의 고립성을 전면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20세기 초반 상나라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甲骨文)이 메소포타미아 설형 문자나 이집트 그림문자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황하 유역에서 발생한 농경이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서 전해졌다 주장할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문명 발생 이전 이미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동서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문화 전파를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물이 제법 쌓여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앙아시아 안드로노보(Andronovo) 문화와 아파나시에보(Afansievo) 문화에선 중국보다 조금 앞서 수레바퀴, 전차, 청동기 등이 제작되었다. 시기상 조금 늦게 상(商) 문명도 비슷한 형태의 수레바퀴, 전차, 청동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차 제작이나 청동기 제련 기술이 과연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기술적 유사성과 시기적 근접성이 놀랍다.
서방에서 활약하는 대표적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기술이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미국 하버드 대학 중국 고고학의 대가 장광즈(張光直, 1931~2001) 교수는 그의 대표적 저서 '중국 고고학'에서 중화 문명의 독자적 기원설을 견지하면서도 전차와 말은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됐을 수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중국 고고학과 미술사를 연구했던 대표적 석학 베글리(Robert Bagley) 교수 역시 중앙아시아의 청동기 제련술이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선진 기술이 유입됐다고 해서 중화 문명의 독자성과 특이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인류사 모든 기술은 서로 보고 배우고 익히면서 지역적 조건에 맞게 변형되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기 때문이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