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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국경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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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9. 14. 18:18

Kyungwoo Chun_ Bird Listener, 2021
천경우 작가의 '버드 리스너'. /아르코미술관
20세기 초 나치의 탄압과 학살을 피해 미국 등으로 망명했던 수많은 지식인들 가운데 당장 떠오르는 몇몇이 있다. 예컨대 독일 출신 유대계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 러시아 태생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마르크 샤갈, 네덜란드 출신의 피에트 몬드리안 등이다. 일일이 죄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예술가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나고 자란 고향 땅을 떠나 국경을 넘었다. 이와 더불어, '이미지학(Bildwissenschaft)'을 개진한 아비 바르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연구소(Warburg Institute) 런던 이전 등은 국경이 강제하던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비판적 사유의 개진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살고 있다. 전쟁, 자본, 정치체제 등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될 때마다 국경, 언어, 화폐는 경계 내외부를 들락거리며 나와 타자라는 '관계'의 필연적인 단절과 변형, 그리고 실존을 위협한다.

국경·경계와 탈경계, 그 관계를 환기하는 작가 천경우의 최근 작업 '버드 리스너'(Bird Listener), (2021, 2025)는 '새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경청'이 중심 주제이다. 인간-자연, 토착민-이민자, 경청자-발화자 등 여러 형태의 관계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헬싱키 비엔날레 2021'커미션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관람객 참여형 퍼포먼스 기반의 설치로 작가는 헬싱키의 발리사리(Vallisaari)섬을 탐색하며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새, 새소리에 주목했다. 특정한 자연환경과 대지에 서식하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새에게 지리적, 정치적 경계는 상대적으로 의미가 적다. 하늘을 나는 새는 자연 정복으로 표상되는 근대성의 기획적 범위 내의 포섭이 그리 쉽지 않았다.

버드 리스너
천경우 작가의 '버드 리스너'. 그가 채집한 새 소리를 듣고 청취자들이 상상했던 새의 형상을 그린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경청하는 '배스트 리스너'의 이름을 적어놓은 그림들.
이 같은 새를 주목한 작가는 헬싱키 앞바다의 섬 주변을 날아다니는 가장 전형적인 새들의 소리를 조류학자와 같이 수집해서 전시장에 설치하였다. 관람객은 각각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헤드폰 중 하나를 들으며 그 새의 형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어진 종이에 준비된 펜으로 자신이 상상한 새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린다.

마지막으로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경청해 주는 실재인물(Best Listener) 한 명의 이름을 떠올리며 자신의 새 그림에 '베스트 리스너'의 이름을 적는 작업이다. '버드 리스너'로서 새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던 관람객은 자신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경청하는 나의 친구, 지인, 후배, 선배 등을 떠올리며 어쩌면 단절되었을 수도 있는 타자와의 교감과 기억, 그 회복과 공명을 상기하는 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말하는 자와 경청하는 자의 공명은 듣는다는 경청의 행위에서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세상에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은 점점 없다는 거예요. 이 작업은 인간과 자연 관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실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역설이죠. 자연 안에서 그 자연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도 들어있으니까요."

중세부터 약 600년간은 스웨덴으로부터, 근대기 들어 약 100년간은 러시아제국에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의 역사가 응축된 섬 발리사리. 역사적·지정학적 의미가 남다른 헬싱키의 발리사리섬은 천경우 작가의 '버드 리스너'들로 인해 다종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존을 사유하는 예술적 제안처가 되었다. 말하는 자와 듣지 않는 자의 아이러니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는 요즘, 나를 경청해 주는 '베스트 리스너'는 누구인지를 생각해 본다.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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