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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포트] 30년만 광주민주화 운동 인정, 장두원 전 KBS 보도본부 주간

[스페셜리포트] 30년만 광주민주화 운동 인정, 장두원 전 KBS 보도본부 주간

기사승인 2010. 12. 1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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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으면 보도하랬다. 내 목숨 하나면 수천이 살 것 같았다"
홍경환 기자] “내가 죽으면 광주시민들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두원 전 KBS 보도본부 주간은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TV뉴스로 보도하던 당시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광주의 참혹한 진실을 방송을 통해 보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 전 주간은 이 사건으로 KBS에서 쫓겨나는 아픔까지 겪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명목은 진실을 밝혔다는 ‘증거’ 부재였다. 그리고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게 지난 12월 13일 국무총리 직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 운동 경력을 인정받았다.

2007년 보안사령부가 5.18 당시 작성했던 내부 문건이 국방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공개되면서 그가 진실을 폭로한 대가로 해직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 이외에도 ‘촌지 받지 않기 운동’ 등 언론 정화활동에도 큰 기여를 했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가 심하던 때 였는데 어떻게 보도할 수 있었나.

“당시 계엄사령부는 5.18관련 뉴스를 한 줄만 보도해도 처형하겠다며 기자들을 협박했다. 당시 언론사는 보도를 하지 못했지만 광주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면과 방송을 통해 나가지는 못했지만 현장 사실을 취재한 기사들이 데스크로 올라 왔기 때문이다. 단지 계엄사의 발표문만 세상에 알려질 뿐이었다.

이 참상을 보도하지 못하면서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광주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신군부가 광주를 무참히 진압할 것 같았다. 수천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목숨 하나 버려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한 뒤 KBS를 담당하던 보안사 요원에게 광주 보도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죽고 싶으면 보도하라’고 협박했다. 난 ‘죽고 싶으면’이라는 전제는 무시하고 ‘보도하라’에 방점을 두고 보도국장에게 보안사 요원이 보도를 허락했다고 하고 광주의 진실을 폭로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두려운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 받을 일을 생각하니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광주의 진실이 보도되기 시작하자 당시 신군부가 발칵 뒤집혔다.

문제의 보도가 브라운관을 통해 나가자 계엄사령부 검열단 단장은 저녁식사를 하다가 자장면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검열 단장이 식사를 중단하고 바로 나에게 전화를 해 ‘누구 마음대로 방송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보안사 요원이 허락했다’고 딱 잡아뗐다. 보도국장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결국 문제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계엄사는 KBS 담당 보안사 요원을 해고했다.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것은 면했는데 해직 당하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그해 7월 130여명의 KBS직원들과 함께 해직 당했다”

-이후 보도본부 주간까지 역임했는데 어떻게 복직됐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언론인들과 공직자들의 복직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80년 해직자복직보상법’이 국회에 제출됐다.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 모두 이 법안에 대해 찬성했다. 하지만 김대중 총재(DJ)의 평민당이 반대를 해 법안 통과가 되지 않았다. 해직자들 중에 정치 사찰 형사도 있고, 야당파괴 공작을 한 안기부 직원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DJ와의 면담을 통해 담판을 짓기로 했다.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DJ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만나자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떤 논리로 그를 설득해야 할지 밤새 고민했다.

DJ를 만나 꺼냈던 첫 마디는 ‘바다 같은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바다는 장마철의 흙탕물도, 똥물도 모두 받아들인다. 극소수의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사찰 형사든 안기부 직원이든 포용하라는 것이 내 주장의 논지였다. ‘80년대 해직자는 신군부, 유신에 반대했거나, 올바른 기사 쓰기 위해 노력했고, 3김을 지지한 사람들 등이었다. 선생님과 관계 안된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런데 선생님이 반대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DJ는 그 자리에서 법안 통과를 약속했다. 그리고 바로 기자들을 불러 당론으로 찬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KBS 전주방송 총국장을 역임하면서 촌지 문화를 사라지게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데.

“전주에 갔을 때 도지사와 도의회 의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촌지를 받고 싶었으면 광주같은 큰 곳으로 갔을 것이다. 목에 힘주고 술 먹고 계집질 하려고 했으면 이 조그만 고향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고향에 진 빚을 갚으러 왔다’

또 편성국장, 보도국장 등 직원들 모아놓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들 월급이 전북에서 가장 많다. 그런데 누구에게 뭘 더 바라는가.’ 이렇게 호통을 치기는 했지만 촌지 문화를 없애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관행상 촌지를 받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들었다. 촌지를 받지 않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적’이 되겠다는 뜻으로 이해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식사를 같이 하며 ‘마음만 받겠다’고 완곡히 이야기했다. 솔직하고 진솔하게 설명하니 대부분 이해를 해줬다”

-고향에 빚을 갚으러 갔다는 의미는.

“당시 광주총국으로 갈 것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거부했다.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들을 준 고향에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주에 내려가면서 목민심서를 두 번 읽었다. 어떻게 해야 고향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깊이 고민했다”

-어떤 일들을 했는가.

“당시 전북은 인구가 200만에 불과했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250만에 이르던 인구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지역민심이 상당히 들끓고 있었다. 차별받는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봤다. 미래의 도시는 공장 굴뚝이 많은 것이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친환경적인 개발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북는 백지의 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백지 상태에서는 무엇을 그려도 다 작품이 된다는 의미였다”

-후배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역사 의식 가지고 기사를 써야 한다.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에 이어 제4부로 불리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언론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매일 되새겨봐야 한다. 언론인들의 펜 하나에서 나오는 기사들이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사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 바란다”

-향후 활동 계획은.

“한글 족보를 만드는데 매진하고 있다. 예전 족보는 우리의 어머니, 누이들을 ‘김씨’ ‘최씨’ 등 성씨만 기록했다. 이름은 없었다. 한글 족보를 만들다 보니 집안에 대한 긍지가 더해진다. 조상 중에는 이성개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지만 두문동에 들어가 ‘순국’한 분도 계시고 독립투사도 많다. 우리 집안은 한결 같이 정의에 살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 아마 목숨 걸고 보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55년 전주 남중학교 졸업
1958년 전주 신흥고등학교 졸업
1959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 입학
1992년 고력대학교 자연자원대학 고위정책과정 수료 및 이사피선
1966~1973년 대한일부 기자(체육부, 정치부, 문화부)
1973~1976년 KBS 보도국(외신부, 편집부)
1976년 KBS 대구방송 보도실장
1979년 KBS 보도국 TV 편집 차장
1980년 강제 해직
1983년 한국 국제교류제단 기획부장
      한불, 한독 수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 한국 측 간사장
1986년 아시안게임 국제 민속축전 상황실장
1987년 국제 인프리 사리오 회의 한국 측 대표단장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국제민속공연 상황실장
1989년~1992년 KBS 정치부장 대우, 문화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 주간
1991년 한국 신문방송 편집인협회 보도자유 분과위원
1992년 KBS 전주방송 총국장
1994년 KBS 아트비전 감사
2000년 한국 문학 번역금고 상임이사
        세종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2001년 정부간행물 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영상물 등급위원회 수입영화 심사위원
2007년~현재 아시아투데이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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