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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너무 독한 양주가 아니었을까?

[강성학 칼럼]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너무 독한 양주가 아니었을까?

기사승인 2023. 04. 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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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기치아래 제1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뛰어든 미국의 제28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은 그가 대학교수 시절에 민주주의 제도와 성격은 의식적인 노력과 자손에 전해지는 적성을 통해서 발전한다면서 오직 영국인들만이 습관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제도에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미국에겐 하나의 강장제였던 반면에, 프랑스와 스페인에겐 흥분제와 천천히 죽이는 독약이었을 뿐이며, 남미의 국가들에겐 하나의 징발된 발광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배양하는 대신에 그것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슨은 미국이 자유롭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갖고 있는 것이지, 미국이 민주주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고 썼다. 윌슨의 주장을 조금 더 연장한다면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국이 선물한 한국인들에겐 너무 독한 양주가 아니었을까? 

1215년 영국의 귀족들은 왕권신수설을 거부하고 전제적 존(John) 왕을 압박하여 근대 헌법의 초석이 된 대헌장(Magna Carta)을 쟁취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했다. 의회는 귀족들의 세계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의 의회와 그것을 대변하는 내각은 옥스브리지(옥스포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합성어)에서 교육받은 귀족출신의 수준 높은 교양인들, 즉 신사들이 영국의 민주정치를 주도하였다.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존 로크(John Locke)의 <시민정부론>에 입각해 토머스 제퍼슨을 통해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지만 독립혁명 전쟁에 승리한 후 미국의 국부들은 자신들의 새 정부형태를 식민지 아메리카를 탄압한 영국식의 의회민주주의를 답습하지 않았다. 미국에선 미국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의 주도로 3권 분립으로 독립전쟁의 목적이었던 자유를 가장 잘 지킬 수 있다고 간주되는 몽테스큐(Montesquieu)의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를 선택했다. 

몽테스큐는 헌정주의와 더불어 시민자유의 보존, 노예제도의 폐지, 점진주의, 온건과 평화, 국제주의, 그리고 국가적 및 지방의 전통을 당연히 존중하는 사회 경제적 발전을 모색하는 문명국가들의 제도와 전망을 주장했다. 그는 정의와 법의 지배를 믿고 여론과 집회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는 모든 형태의 극단주의와 광신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개인들이나 집단이나 다수의 전제적 지배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권력의 균형과 권위의 분할에 자기의 신념을 두었다. 그는 사회적 평등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자유를 옹호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질서 있는 정부를 방해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제국과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전제정치가 지배했고 스페인에서는 교권주의가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야만주의가, 그리고 유럽에선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요란한 성장이 만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테스큐 가르침의 본질들은 미국을 선두로 모든 곳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심장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21세기 우리에게 말할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그의 가르침의 자유주의적 측면들은 오랫동안 토크빌(Tocqueville)과 밀(Mill)에서 시작하여 윌슨 대통령의 애처로운 고지에 오른 자유주의의 웅변적 상식으로 퇴보했다. 몽테스큐의 루소, 칸트. 흄, 벤담 같은 가까운 후계자들은 여전히 인간들의 마음을 휘젓고 뜨거운 불화를 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주장했지만 몽테스큐는 위대한 매력의 작가, 법을 준수하고 교양 있고 장엄한 한 사람의 귀족으로 남았다. 몽테스큐의 견해들이 그의 19세기 후계자들의 견해보다는 21세기 우리 자신의 상황에 훨씬 더 많은 적실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몽테스큐는 일찍이 민주주의 지속에 대한 치명적 위협으로 소위 "부드러운 전제정치"(soft despotism)의 출현을 경고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전해가는 어느 단계에서 갑자기 대중 인기영합주의(popularism)에 의해 스스로 자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전제정치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사악한 정치인들이 일반국민들에게 더 많은 복지의 혜택이라는 유혹으로 시민들의 이성을 달콤한 환각제로 마비시켜 민주정치가 고통이나 저항 없이 전제정치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현실의 불만의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바로 불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자살행위지만 국민들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부드러운 전제정치에 매몰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고전 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사적 이익에 사로잡힌 선동가들에 의해서 민주정치가 폭도의 반란을 통해 폭정(tyranny)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제정치의 고통스러운 세월을 한동안 겪고 난 후에야 새로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또 시작할 것이다. 볼테르의 말처럼,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을지 몰라도 이처럼 인간들은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이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독립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새롭게 탄생한 민주공화국의 유지와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인들에게 일정한 지적 수준과 교양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퇴임할 때 고별사에서 새로운 세대에게 그런 교양 교육을 위한 대학의 설립을 촉구했다.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아예 자기 개인의 재산을 털어 대학을 세웠다.

오늘날 우리의 수많은 대학에서 시민적 교양을 고양시키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대학을 졸업한 한국의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양식을 보면 지성이나 교양과는 아주 멀어 보인다. 때로는 그들 중 상당수가 민주주의라는 독한 양주에 취해 이성을 잃고 부끄러움도 없이 마구 술주정을 부리는 것만 같다. 윌슨 대통령의 말을 다시 원용하면, 한국에서 독한 양주 같은 민주주의가 흥분제나 발광제가 아니라 강장제가 될 수 있도록 절제 없이 민주주의를 퍼 마시는 교양 없는 정치인들을 다음 선거에선 정계에서 깔끔히 추방해야할 것이다. 그런 정치인들은 하나뿐인 조국에 해악만을 끼치고 자신의 모교에는 불명예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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