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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첫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강성학 칼럼]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첫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기사승인 2023. 04. 2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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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20세기는 누가 말해도 "미국의 세기"였다. 그리고 미국의 세기를 열었던 인물은 미국의 제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러시모어 바위산(Mount Rushmore)에 그의 얼굴이 새겨진 20세기 유일한 대통령이다. 그는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인들의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바위산에 있다. 루즈벨트는 미국을 처음으로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1909년 그가 백악관을 떠난 1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도 그의 '사나이'다움, 즉 넘치는 에너지, 지성, 그리고 카리스마의 집단적 기억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는 분명히 까마득한 후임 대통령들의 좋은 롤 모델이었다. 그는 분명히 먼 후임 대통령들이 닮고 싶어 하는 기관차처럼 미국을 이끈 불굴의 사나이다운 삶과 빛나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여준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대통령에게도 가장 필요한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재임시에 있었던 미일간의 소위 가쓰라-태프트 협정(the Katsura-Taft Agreement) 때문에 아주 부정적인 인상이 각인되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역대 45명의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순위에서 항상 최저 4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데도 한국인들은 그의 진면목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밀한 분석의 결과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민족주의적 분노와 지적 탐구의 태만이 함께 작동한 결과다. 실은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한 영웅으로서 위대한 세계사적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강대국간 힘의 균형을 모색하며 미국이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로서 행동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여러 분야에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우선 첫째, 미국 역사상 최초의 진보주의적 대통령이었다. 독점기업들의 분쇄와 같은 그의 권력행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온건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 그것은 미국 정치체제엔 하나의 충격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화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관리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경제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정부가 건전한 경제를 위해 거대 기업의 독점과 비행에 대해 간섭하려 할 때면 루즈벨트의 귀신이 어디에선가 웃고 있을 것이다.

둘째, 대외정책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지구적 강대국으로서 역할을 수락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촉구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맥킨리 대통령의 해군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the Navy)로서 루즈벨트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촉구했다. 후에 대통령으로서 그는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지구적 돌출은 장기적인 계획임을 이해하게 할 것이다. 그의 팽창주의는 이상주의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그도 역시 민주주의의 확산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미국의 목적에 저항하는 타국의 선출된 지도자를 타도하고자 시도할 때에는 루즈벨트의 유산도 역시 작동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팽창주의와 국제적 위상의 격상과 함께 미국 대통령 자신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치솟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년 러일전쟁의 종결 시 평화회담을 주선하고 중재에 나서도록 교전국 일본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포츠머스 평화조약에 성공적으로 이르게 한 국가원수였다. 게다가 1904-1906년의 모로코 위기(the Morocco Crisis)시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분쟁 당사자인 독일 카이저의 초대를 받았고 그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 미국 대통령들은 국제적 긴장과 갈등이 심각해지면 그것의 해소를 위한 중재자로 행동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1907년 그는 미국의 16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미함대로 하여금 1년이 넘는 기간을 통해 세계 최대 군항들을 방문하면서 전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해를 시킴으로써 이제는 미국이 명실상부한 해양 강대국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셋째, 의회가 대통령에 대해 꾸준히 우위를 점했던 30년 후에 루즈벨트가 백악관에 들어갈 때 그는 자기가 전임자들과는 다른 종류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로부터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에 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언론과 학계에서 종종 등장한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라는 것은 모두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본보기에서 어느 정도 덕을 본 것이다.

넷째, 루즈벨트 대통령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업적과 유산은 최초로 환경보존(environmentalism)을 최초로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자연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수립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심지어 국가의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자기 세대의 의무조차 말할 권리를 인정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낭비할 권리나 후손들에게서 약탈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50곳의 국가의 산림, 51곳의 야생동물 피난처, 5곳의 국립공원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공기, 물, 그리고 산림 및 야생동물의 생명이 어떻게 해서든 미국인들의 집단적 보호 하에 있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을 남겼다. 그는 아프리카 사파리 원정과 남아메리카 아마존의 탐험을 감행하여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의 토대를 놓았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모든 것을 단호하게 처리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게 저장된 위대한 미래에 대한 최고의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루즈벨트보다 미국의 운명에 대해 더 많이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미국의 위대한 미래로 가는 기관차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그는 100여전의 미국의 대통령이었지만 어쩌면 그는 최초의 현대 복지국가의 선구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야심적 사나이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나이다운 대통령으로서 젊은이들의 롤 모델이었으며 국민적 교사(teacher)와 같은 정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삶에서 새롭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시어도어 루즈벨트야 말로 오늘날 한국인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그런 정치 지도자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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