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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정치에 물든 지식인의 배반(Betrayal)은 우연인가?

[강성학 칼럼] 정치에 물든 지식인의 배반(Betrayal)은 우연인가?

기사승인 2023. 06. 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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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지식인은 진리를 항구적으로 추구한다. 반면에 정치가는 우발적인 사건들을 다룬다. 사상가는 무엇이 옳은지를 정의할 의무를 갖는다. 반면에 정책결정자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다루어야만 한다. 교수는 궁극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추지만 정치인은 궁극적인 해결이란 별로 없는 길을 정처 없이 거닐면서 뭔가를 해결하고 나면 그것이 종종 새로운 문제로 들어가는 문턱이 된다. 드골(De Gaulle) 대통령은 철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에게 쓴 편지에서 바로 그 딜레마를 특징적으로 요약했다: "나는 종종 당신이 쓰는 글에 공감하지 않고 또 나는 처음부터 내가 하는 일을 당신이 승인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분명히 측정이 안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전례가 없는 운명으로 우리 모두를 몰고가고 있는 거대한 홍수를 에워싸려는 당신의 방식을 찬양한다는 것을 믿어주기 바란다."

지식인은 정치인들과는 분리되지만 잠재적으로 뒤얽힌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인과 정치가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존재한다. 지식인의 세계와 정치인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상이한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분리된다. 지식인은 진리를 추구하고 정치가는 권력을 추구한다. 이런 상이한 지향은 단순히 정치가에 대한 지식인의 우월성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윈스턴 처칠과 같이 고도로 지적이고 또 재능 있는 정치가는 세상사에 지적이지만 현명하지는 못한 지식인보다 더 실질적인 진리에 훨씬 더 가까울 수 있다. 지식인과 정치가 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은 상이한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기에 진리를 추구하는 이상적 형태의 지식인은 권력을 의식하지 않는다. 반면에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은 기껏해야 진리를 자신의 권력추구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두 세계는 동시에 잠재적으로 뒤얽혀 있다. 왜냐하면 진리가 권력과 관련된 메시지를 갖고 있고 또 권력의 바로 그 존재가 진리의 표현과 인정에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권력을 위협하고 또 권력은 진리를 압박한다. 그들은 서로 어느 정도 적대적이다. 권력은 효과적이기 위해서 실재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남들과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속임(deception)은 권력의 행사와 분리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권력의 가면을 벗김으로써 진리는 최소한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권력을 수세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진리는 권력의 목적과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여 권력이 작동하는 바로 그 틀을 위험하게 만든다. 진리는 만일 충분히 강력한 이익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면 실제적인 정치의 차원에서 기존의 권력에 도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이런 이익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면 어제의 진리가 새로운 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또 은닉하면서 오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지식인이 부패한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된다. 그리고 진리는 권력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권력에 대해 지식인은 네 가지 형태를 취한다. 첫째로 부패를 두려워하는 지식인은 정치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소위 상아탑에 영구히 안주한다. 그러면서 그는 미켈란젤로(Michelangero)에 의해 피렌체의 운명에 무관심하다고 비난 받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처럼 아름다움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아탑으로 후퇴하는 것은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

둘째로 지식인은 권력에 대해 새로운 '약속된 땅(the promised land)'을 가리키며 기존의 권력에 전면적 비판자가 된다. 그는 마치 선지자나 예언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늘 새로운 세상의 꿈을 꾸는 자이다. 그에게 그 꿈이 전혀 실현성이 없거나 악몽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는 일부 맹목적 지지자들의 인기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그는 한마디로 몽상가이다.

셋째로 지식인은 정치의 영역 밖에 머물면서 자신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의 지식과 통찰이 정치의 목적과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있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치의 밖에서 바라보면서 자기의 기준에 의해 그것을 판단하고 꾸짖는다. 그는 권력에 진리를 말한다. 그는 권력에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권력의 외부인이다.
 
넷째로 지식인은 정치권에 전문가로 들어갈 수 있다. 그 경우에 그는 정부의 목적이나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정부가 작동하는 틀을 주어진 것으로 수용한다. 그는 권력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특별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는 진리를 권력에 봉사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가 작용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여전히 진리이다. 지식인으로 하여금 민주적 과정과 정책의 향상을 위해 이런 중요한 일을 수행하게 하는 것은 직업의 안전으로 표현되는 외부 압력으로부터의 면제이다. 그는 권력자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이상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에 진리를 말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전임제도(tenure)에 의해 신분과 생활의 보장을 받고 있는 대학교수들이 정치의 세계, 특히 행정부에 전문가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경우에 지식인은 두 가지의 유혹에 직면한다. 하나는 완전한 무책임이고 또 하나는 필연적 부패이다. 우선, 그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하나는 권력에 항복하고 권력의 전도사가 된다. 이것은 지식인의 필연적인 부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인은 여전히 가식을 유지하고 또 여전히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위신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제 그 지식인은 진리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받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권력기준의 심판에 직면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그(ideologue)나 정치적 에이전트(agent)가 된다. 그는 저질의 마키아벨리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겉으로는 마치 자기가 여전히 진리의 추구에 헌신하는 것처럼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지식인들의 배반(the Betrayal of Intellectuals)'을 목격하게 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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