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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국가 간 군사동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강성학 칼럼] 국가 간 군사동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사승인 2023. 08. 3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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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이나 친구가 없다. 오직 국가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유명한 경구는 1848년 파머스턴(Palmerston) 영국 수상이 의회에서 했던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거의 반세기 전 1796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에 담겼던 국제정치의 원칙이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정책은 어떤 외국과도 항구적인 동맹을 맺지 않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그 후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때 가서는 '워싱턴 규칙(the Washington Rule)'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도 1801년 영국과 나폴레옹의 전쟁 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타국들의 분쟁에 말려들게 하는 동맹(entangling alliance)'을 피하라고 경고함으로써 이것은 미국 국부들의 교훈적 유산으로 간직되어 왔었다. 이것은 미국의 가장 오래된 고립주의(isolationism)의 전통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중립주의 혹은 고립주의 전통의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을 맞아 평화 시에 가장 많은 국가들과 군사동맹을 맺은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 제국의 팽창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동맹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제2차 대전 중에 동맹국이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국이 이제는 미국의 적대국이 된 반면에 치열하게 싸웠던 적국인 독일과 일본은 오히려 미국의 동맹국이 된 것이다. 파머스턴의 경구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그렇다고 예외적이긴 하지만 항구적인 동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703년에 영국과 포르투갈이 체결했던 동맹은 수세기 동안 살아남았다. 영국의 함대에 의한 자국 항구들의 보호라는 포르투갈의 이익과 포르투갈로 들어가는
대서양 접근을 통제하는 영국의 이익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 간 군사동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현대 국제정치학에서 소위 영국학파의 아버지 마틴 와이트(Martin Wight)에 의하면 동맹이야말로 국제정치의 본질이다. 동맹은 다국적 국제체제 속에서 작동하는 힘의 균형(the balance of Power)의 필요한 기능들 중 하나다. 서로 경쟁하는 두 국가에게 그들의 상대적 힘의 지위를 유지하고 향상하는 데 3가지 대안적 선택이 있다. 첫째, 그들은 자국의 힘을 증가시키거나, 둘째, 자국의 힘에 타국들의 힘을 추가하든가, 아니면 셋째, 타국들의 힘을 적으로부터 거두도록 할 수 있다. 그들이 첫째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그들은 군비경쟁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둘째나 셋째 대안을 선택을 할 때에 그들은 동맹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국가가 동맹정책을 추구할지 여부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의 문제다. 타국의 지원 없이도 자국을 유지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고 스스로 믿거나, 혹은 동맹의 결과로 인한 공약의 부담이 기대하는 이익을 압도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국가는 동맹을 기피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과 미국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타국들과 평화 시에 동맹에 들어가지 않았다. 영국은 그것을 '화려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자국을 '예외적 국가'라고 자부하며 '미국적 차이(American difference)'를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the Monroe Doctrine)의 선포로부터 1941년 진주만(the Pearl Harbor)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까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대해 마치 그들이 동맹국인 것처럼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간 동맹을 맺지는 않았다. 그 기간 영-미의 관계는 국가들이 동맹이 없는 또 다른 예의 상황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들의 이익이 그런 동맹조약의 형태로 그런 이익, 정책, 그리고 행동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불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협조적 정책과 행동을 분명히 요구할 때 발생한다. 영국과 미국은 유럽 대륙에 관해서는 한 가지 공동이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힘의 균형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국이 그런 유럽의 힘의 균형을 보호하기 위해서 1914년과 1939년 전쟁에 들어갔을 때 미국은 처음에는 중립국에 걸맞은 가시적 공정성에 벗어나 영국을 지원했고 그러고 나서 전쟁에 합류했다. 만일 미국이 1914년과 1939년에 공식적 동맹조약에 의해서 영국에 묶여 있었더라면 미국은 보다 일찍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미국의 일반적 정책과 구체적인 행동은 실제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의 정책과 행동을 요구하는 모든 이익의 공동체가 명시적 동맹으로 법적 성문화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국가들이 공유하는 이익은 지리적인 지역, 목표, 그리고 유럽의 힘의 균형의 보존에 영국과 미국의 이익이 그랬던 것처럼 적절한 정책에 전형적으로 그렇게 정확하고 제한되지 않았다. 또한 그것들은 전망되는 공동의 적에 관하여 정확하고 제한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나폴레옹과 영국 사이에서 그의 동정심이 오락가락했던 것처럼, 나폴레옹 전쟁 이후 1세기 동안 영국과 미국은 변하는 환경 속에서 당장에 누가 가장 큰 위협인지를 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제3국을 겨냥하여 두 국가를 묶는 전형적인 이익은 적과 추구하는 목표와 정책이 보다 명확하다. 19세기 말 10년 동안에 프랑스는 독일에 반대하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반대하고,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를 겨냥한 독일과 동맹이었다. 어떻게 프랑스와 러시아의 이익이 공통분모를 찾고 정책과 행동지침을 결정할 수 있었을까? 환언하면, 조약 해당 사유가 적과 친구 모두가 그들 각자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분명한 비상시에 무엇을 기대할지 정의되어야 한다. 그런 일은 1894년 프-러 간 동맹조약으로 발생했다. 프-러 간의 동맹조약 정책과 목표를 분명히 했더라면 유럽에서 영-미의 협력처럼 어떤 동맹조약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 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모든 이익의 공동체가 이런 협력의 관점에서 동맹조약의 법적 규정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공동의 이익이 정책과 행동의 면에서 미성숙하여 동맹조약이 그것들을 명시적으로 하고 또 작동하게 하는 데 필요할 때에만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동맹국들의 이익이 동일하지는 않으며 동맹체제 내에서 비용과 혜택의 분배가 동일한 것도 아니다. 국가 간의 정의는 일찍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간파했던 것처럼 동등한 힘을 필요로 한다. 군사동맹의 목적이 그것을 수용하는 국가의 영토적 및 정치적 순결이라면 그런 동맹은 사실상 제공하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보장해 주는 조약과 구별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국은 경제적 공동이익과 이념적 공동가치로 군사동맹의 필요성을 보완하여 이런 불균형을 메꾸려는 노력을 추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기여의 정도차이는 동맹관계를 여전히 시니어 파트너와 주니어 파트너라는 불평등한 관계를 극복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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