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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반 백성들이 글을 아는 것은 곧 유식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지배계층인 사대부(士大夫)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사대를 현실적인 외교적 수단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이념으로 만들었던 그들은 그 이념을 내세워 중국 글자인 한자를 써야 한다며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에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애민과 민본에 투철한 세종은 “너희들이 자음과 모음을 아느냐”고 꾸짖으며 이제껏 세상에 없던, 배우고 쓰기 쉬우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우리말을 적어내는 새로운 소리글자 한글을 만들어 공표하고 언문청(諺文廳)을 두어 한글을 보급했다. 그리하여 한글은 ‘용비어천가’ 등의 문학 작품의 창작에, 두보의 시 및 유교 경전 등의 번역에, ‘농사직설’과 같은 실용서와 ‘내훈’과 같은 교화서와 정확한 발음기호가 필수적인 외국어 교육서 등의 표기에, 두루 사용되었다. 세종 이후에도 한글은 꾸준히 보급되고 소설, 가사, 시조의 창작과 서신에도 활발히 활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대부의 아집으로 한글은 공식 문자로 채택되지 못했고 공문서 작성에도 사용되지 않았다. 사대에 찌든 사대부들은 한자를 ‘진서(眞書)’라 높여 부르고, 한글은 ‘언문(諺文)’으로 낮추어 부르면서 폄하했다. 심지어 폭군 연산군은 자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한글로 쓰였다는 이유로 선대의 업적인 한글의 교육을 중단시키고 한글로 된 문건을 수거하여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흥청’(興淸·연산군이 전국에서 모아들인 기녀)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한글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그때에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한글이 되돌릴 수 없이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본래는 28자)로 이루어진 음소 문자이며 이들의 조합으로 일만 천여 개의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 그래서 외국어와 자연의 소리를 적는 데에도 편리하고, 문자의 디지털화에도 유리하다. 이런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은 국제 언어학계의 상식이다. 영국의 다큐 작가 존 맨은 한글을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으로, 일본의 노마 히데키 교수는 “천 년 한자 역사 속에서 한글이 탄생한 것을 세계 문자사의 기적”으로 평했다. ‘스타 트렉’의 작가 조 메노스키는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에 매료된 나머지 ‘세종 더 그레이트’라는 한글 창제 과정에 관한 판타지 소설을 썼다. 세계 모든 문자에 대한 옥스퍼드 대학의 평가에서 한글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과학 전문지 ‘디스커버리’(1994.6)’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로 극찬했다.
이런 한글이 겨우 1894년에야 공식 문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정착도 되기 전에 일제에 의해 말살의 위기에 몰렸다가 1945년 광복 후에야 모두가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래로, 한국의 문맹률은 1% 이하로 세계에서 가장 낮아지게 되었고, 한국의 산업과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60여년 만에 세계에서 한국만이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달성하고 선진국이 되었다. 이에는 한글의 깨우침 덕이 크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바탕인 한글이라는 ‘세계적 발명품’과 그 창제자 세종대왕을 기리고, ‘세종학당’을 더 많이 개설하여 한글과 한국어를 더 널리 보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