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중국과 수교…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외교 성과
비자금 조성, 첫 전직 대통령 구속…한국 현대사의 그늘
|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 12일 육사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쿠테타를 주도하며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한 뒤 전두환 5공 정권의 2인자로 급부상했다. 5공 출범 뒤에는 정무2장관을 시작으로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85년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며 사실상 전 전 대통령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10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며 차기 대통령직을 예약했지만 시대적인 민주화 요구 속에 ‘6·29 민주화 선언’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며 전 전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6월 29일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 항이 담긴 선언문을 전격 발표하며 군사정권 2인자에서 민주화의 조연으로 변신한다.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노 전 대통령은 독자 출마를 강행한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돼 1988년 2월 취임한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여당인 민정당의 총선 패배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자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공화당과 합치는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출신과 이념이 다른 정파가 합친 민자당은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삐걱댔고 국정 장악력이 위축된 노 전 대통령은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소련의 해체로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한 국제적 변혁기에 재임한 노 전 대통령은 통일·외교 분야에선 혁혁한 성과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한 뒤 다음해 헝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7개국과 관계를 정상화한다.
특히 1990년 6월에는 소련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9월 전격 수교했고, 1992년 8월에는 중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했다. 남북관계에서는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킨 뒤 1991년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95년 재임 중 41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전직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전 전 대통령과 함께 법정에 선 노 전 대통령은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징역 17년 형과 추징금 2600억여원을 선고받았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뒤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노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1979년 10월 26일)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