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태 청풍김씨 대종회장은 이날 낮 12시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350번지에서 우사 김규식 기념공원 개장 및 조형물 제막식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우사 김규식 선생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한 활동에 진력한 애국자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을 통틀어 국제 정세에 관한 정확한 판단과 진정성 있는 헌신에 있어 가히 으뜸으로 꼽을 만한 인물"이라며 "그러나 선생을 기릴만한 추모공간이 없어 늘 안타까워하던 중 문중원들의 성원에 힘입어 선조님들이 잠들어 계신 이곳 오향리 아늑한 언덕 아래 단촐하나마 선생님의 기념 공원을 조성하고 조형물을 세워 후세의 지표로 삼고자한다"고 말했다.
우사 김규식은 1918년 8월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 창립에 동참하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김규식은 1918년 11월 28일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갖고 참석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피선됐으며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 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해 일제 침략의 부당함과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김규식은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김규식은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해 남북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 해 4월엔 김구와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성과없이 돌아온 뒤 5·10남한단독총선거에 '불반대·불참가'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치활동을 마감했다.
김규식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납북돼, 그 해 겨울 서거했다. 김규식은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