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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모순되지만 그러나 사실상 연계된 두 개의 오류가 역사의 숭배의 기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즉,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스스로 절대주의에 빠졌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무한정의 상대주의에 빠졌다. 그러나 아롱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쌍둥이 오류들을 인간의 사실들에 관한 회고적 지식과 이해의 논리로 모두 거부했다. 역사가는 행동, 제도 그리고 법률의 다양한 의미를 발굴할 수 있지만 전제의 유일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역사는 우스꽝스럽지 않았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누구도 역사의 유일한 궁극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의 다양성은 이해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고 현실의 풍부함과 역사적 해석의 갱신을 의미한다. 아롱은 인간사가 통일되었거나 총체적 사회(society of totality)라는 견해를 거부했다. 사회의 요소들이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간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총체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 속 인류의 모험은 모든 인간들이 구원을 집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정도로 하나의 의미만 있다는 것이다. 역사 철학들이란 세속화된 신학들이다. 역사의 종말과 같은 모호한 개념에 의지하는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광신주의의 죄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단적 선을 위해 개인들의 이기심과 열정을 활용하기 위해 정치가들이 애쓰는 지혜의 규칙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의 다원성은 우리 자신들의 무능력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의 한계와 현실의 복잡성을 폭로한다. 우리는 세상이 본질적으로 애매하다고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진리에 다가갈 어떤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역사철학은 오직 광신주의만을 낳는다. 역사적 운명이란 항상 결정되어 있지 않다.
제3부의 '지식인들의 소외'에서 아롱은 지식인들에 대해 오랫동안 지연된 사회학이라고 보는 것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라는 용어 그 자체가 정의하기 어렵다. '인텔리겐치아'라는 용어는 19세기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지식인들의 '직업병'은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고 또 그들의 조국과 제도들을 현재의 현실들을 다른 현실이 아니라 이론적 아이디어와 비교함으로써 비판하는 경향이다. 프랑스는 종종 지식인들의 파라다이스로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패러독시컬하게도 혁명가들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도 많은 지식인들이 그들에게 명예로운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그들의 활동에 아무런 제약을 하지 않고, 그리고 정신적 작품들이 최고의 가치를 선언하는 사회를 혐오하는 것일까? 그들은 황야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의 자유를 수복한 유럽을 꿈꾸었고,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그들의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원천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좌익은 선호하는 이데올로기와 갈등을 일으키는 수단을 통해서 미국이 성공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 대해 원한을 품는 것이 사실이라고 아롱은 주장했다. 즉, 번영, 권력, 경제적 조건의 획일화 경향 등 이런 결과들은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사적인 이니셔티브와 경쟁에 의해서, 다른 말로 말하면, 모든 잘 길러진 지식인들이 경멸하도록 배운 자본주의에 의해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아롱은 지식인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현재 세계상황의 네 가지 기본적 요소들을 제시했다.
첫째는 서방세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다툼이 그것의 감정적 잠재력을 잃고 있는 중이라는 요소이다.
두 번째 요소는 전쟁 중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의회제도의 실패와 전체주의 국가, 즉 소련의 부상으로 야기된 대의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셋째로는 칼 마르크스라는 19세기 서방세계의 지식인에 의한 19세기 자본주의 비난과 오늘날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지식인들이 느끼는 열정 사이에는 이미 수립된 조화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로는 소련진영과 서방세계 사이의 거대한 분열이 런던과 봄베이, 워싱턴과 도쿄에서 다르게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종교 사이에, 그리고 고대 세계를 통해 기독교의 확산과 우리 시대 마르크스주의의 확산은 빈번히 비교된다. 아롱이 창조한 '세속적 종교'라는 표현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공산당은 부르주아들이 반대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런 아롱의 견해에서 기독교인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결코 될 수 없었다.
아롱의 결론은 이데올로기 시대가 종식에 도달했는가를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물론 가까운 장래에 평화가 만발할 것으로 기대할 만큼 그렇게 자신이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일단 권력을 장악한 혁명가들이 환멸을 느끼거나 제거되면 관료들이 계속해서 군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인민들은 아마도 보다 더 큰 회의론과 정치적 관용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물질적 풍요의 덕택으로 박애의 비전을 구상하는 낙관주의자나 대량 통신과 고문의 새로운 수단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폭정을 내다보는 비관주의자 모두 20세기의 경험에 의해서 완전히 부인되었다. 첫 공장의 시대에 시작한 그들의 대화는 지금도 여전히 추구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롱에 의하면, 대립하는 주제들이 더 이상 특수한 계급이나 정당에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계급투쟁이론은 거짓된 유추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다. 그것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가 프랑스 혁명 시에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부르주아가 시작했던 일을 끝낼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경쟁은 귀족주의와 부르주아 간의 경쟁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무엇을 말하든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개념에 대항하는 세계에 대한 개념을 결코 가진 적이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한 이데올로기가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 혁명의 자코뱅당식 해석, 그리고 영국의 저자들에 의해서 개발된 시장경제에 대한 비관적 이론 사이에서 하나의 기발한 합성을 달성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사이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를 프롤레타리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환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레이몽 아롱에게는 어느 인텔리겐치아도 프랑스 인텔리겐치아만큼 인류 전체에 적용될 진리를 갈망하면서 소위 보편성의 상실을 그렇게 많이 겪지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사태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모스크바로부터 유고슬라비아가 파문을 당한 얼마 뒤에 당시 티토(Tito)는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채 진보주의자들이 서방국들을 비난했던 비슷한 논리로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프랑스의 티토주의자들의 위신은 즉시 땅에 떨어졌다. 지금 1954년 말에 마오쩌둥의 중국이 그들의 찬탄에 있어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를 계승했다. 그러나 마오의 정권이 프랑스에게 어떤 가능한 모델을 제공할 수 있느냐고 아롱은 물었다. 아롱은 관용에 대한 호소와 함께 광신주의의 거부로 끝을 맺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성에 입각한 신념이 회의주의에 의해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나의 계급, 한 가지 형식의 행동과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이상화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보다 정의로운 사회나 인류에 보다 덜 가혹한 운명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롱은 명확히 했다. 어쩌면 회의주의의 오직 강력한 치료만이 지식인들에게서 그들의 광신주의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성적인 진리뿐만 아니라 관용되는 회의주의를 위한 자리가 있을 것이다. 만일 관용이 의구심에서 나온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델이나 유토피아를 의심하도록 가르치고, 모든 구원의 예언자들과 재앙의 전령관들에 도전하도록 가르치자. 만일 회의론자들만이 광신주의를 폐기할 수 있다면 회의론자들의 도래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
1977년 자신의 생의 말기에 레이몽 아롱은 이데올로기의 종식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참을성 있게 진리를 추구한다. 우리는 파스칼(Pascal)을 올려다보고 이데올로기들의 적합한 이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사망 3년 전인 1980년에 좌파 교수와 좌파 언론인과의 유명한 텔레비전 토론에서 '이데올로기들의 종언'을 상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단언했다. 그가 사망한 1983년 프랑스어로 출판되고 1990년에 영어로 번역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은 여전히 그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52년과 1954년 사이에 천천히 그리고 약간의 어려움을 갖고 그 책을 썼다고 했다. 1951년과 1955년 사이에 아마도 저널리스트적 특징의 희생자이지만 그러나 특히 개인적인 불행에 상처받았던 그는 이 말의 결합이 모순되지 않는다면, 쉴 새도 없이 다양한 활동과 스튜디오의 전환으로 도피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지식인의 아편' 덕택에 내 자신을 치유하고 또 구원했다는 인상, 어쩌면, 환상을 가졌다. 나는 이 책이 직면한 공격들에 대해 거의 무관심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끝으로, 아롱은 그가 생전에 목격할 수는 없었지만 1990년대 좌파들의 일종의 '교황청'이고 '메카'였던 소련 공산제국과 그 위성국들의 몰락으로 20세기의 역사는 당시 프랑스의 지성계를 지배했던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좌파 지식인들이 아니라 외로운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이 옳았음을 마침내 입증해 주었다. (그의 일생에 관한 필자의 평가를 위해서는 본지, '레이몽 아롱: 자유주의의 외로운 부엉이' 2024년 6월 21일자 참조). 그는 참으로 위대한 20세기의 지혜로운 지적 스승이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