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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길의 뭐든지 예술활력] 새해에는 그리스 비극을 많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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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2. 02. 17:28

오이디푸스 역의 배우(1896년)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배우(1896년)
십여 년 전, 버스를 타고 명동 근처를 지나가는데 나의 눈길을 순간적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명동성당 뒤쪽 언덕배기에 위치한 삼일로 창고극장에 힘겹게 붙어있는 문구였다. 마치 "아무리 힘겨운 세상이라도 예술은 살아있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술을 통해 밥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가슴에 와닿는 문구였기에, 삶의 힘겨운 고비마다 되뇌어보는 말이 되었다.

필자는 20대 후반부터 연극과 축제를 제작하고 기획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한 해도 금전적으로 풍족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도 공연예술 외에 다른 일을 고민한 적은 없었다. 여전히 "연극을 어떻게 만들지?" "어디서 공연하지?"를 고심하며 살고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 가장 집중해서 본 연극은 '대한민국 연극제'의 한국-그리스 합동공연 '안티고네'였다.

2400년 전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을 현재의 그리스 연출가와 한국 배우들이 함께 올린 작품인데, 관람 후 한참 동안 여운이 남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소포클레스의 다른 희곡 '오이디푸스'를 다시 펼쳐 읽었는데, 20대 때 읽었던 느낌과 50대가 되어 읽는 희곡 대사의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른 다음 내뱉는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아폴론이오. 하지만 내 눈빛을 사라지게 한 것은 아폴론 신이 아니라, 바로 나 오이디푸스요!"와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라는 대사가 마음에 큰 울림과 위로로 다가왔다.

신들이 계획한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진실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꿋꿋하게 자존감을 지키는 인간의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이것은 21세기 AI 시대에 연극인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보내는 박수이기도 하며, 그리스 비극에 다시 빠지게 된 신호탄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야외극장에서 비극을 보는 것이 자유시민의 기본소양 중 하나였다. 시민이 국가의 의사결정과 집행에 직접 참여하는 고대 그리스에서 야외극장은 자유시민의 행동양식을 토론하고 성찰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곳에서 과거의 비극적 사건 속 주인공의 삶을 연극으로 보면서 직접민주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숙고하였으며, 자기반성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스 비극에서 일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인간의 오만이 어떻게 불행을 자초하는가?"다. 영웅이었지만 불완전한 인간(주로 '왕')이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파멸하는 모습을 시민에게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비극을 통해 겸손한 마음으로 신을 경배하고, 동료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지혜롭게 살 것을 자연스럽게 강조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주인공을 통해 운명을 피해 도망가지 말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역설하였다.

지난 12월 계엄사태를 보며, 우리나라의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그리스 비극을 보았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비극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보면서 자신의 오만을 뉘우치고, 대화의 정신을 되살리며, 겸손함과 지혜를 배우면 좋지 않을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이미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어른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청소년들에게 비극의 관람기회를 많이 주어야 하겠다. 재미있다고 코미디물만 보여줘서는 안 된다. 새해에는 나부터 아들과 함께 비극을 보러 가야겠다. 비극은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하고 인간의 가치를 재해석하며 삶을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하니까!

/문화실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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