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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을 '인지'하되 '공인'하지는 않는다
우선 트럼프의 발언은 북핵을 '인지(recognize)'한다는 것이지 북한을 정상적인 핵보유국으로 '공인(accept)'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 국가가 공인된 핵보유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문턱(technical threshold)과 정치적 문턱(political threshold)'이라는 두 개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핵무기 보유를 인지시키는 것이 첫 문턱이며, 핵보유 상태에서 정상국가로 대접받게 되면 두 번째 문턱을 넘은 것이 된다. 핵세계에는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이 '공인'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국과 NPT 바깥에서 핵을 보유한 후 미국의 묵인을 얻어 두 번째 문턱을 넘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사실상 공인된' 3개의 핵보유국이 있다.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은 첫 문턱을 넘은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과거 미국에 '핵국 대 핵국 간의 대화'를 요구했던 것은 두 번째 문턱을 넘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트럼프의 발언은 북핵을 공인하고 제재를 해제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며, 북핵의 존재를 인지한 상태에서 핵위협을 저감시키기 위한 협상 용의를 밝힌 것이다.
물론 '최강경 대미 대응전략'과 '강대강 정면승부의 대적 투쟁 원칙'을 강조하면서 미사일을 펑펑 쏘고 있는 북한이 언제 핵대화에 응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핵협상이 가시화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론부터 말해, 미·북 핵대화를 통해 북핵이 감축·동결되거나 고도화가 늦추어진다면 한국에는 좋은 일이다. 한국에 설득으로 북한의 핵포기를 끌어낼 방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강경하거나 당당한 외침이 아니며,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북핵을 방치하겠다는 소심한 목소리다. 미국이 ICBM과 같은 장거리 핵무기를 포기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보이더라도 분노할 일이 아니다. 북한의 대미 핵공격 능력이 한·미동맹을 이간하고 미국의 핵보호 공약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또한 한국 안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북핵을 인정하려는 것인가"라고 발끈할 것이 아니라 미·북이 무엇을 주고받는지를 살피고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손해가 되지 않는 협상이 되도록 선도함으로써 '한국 패싱'을 막는 것이다. 북한은 경제적·군사적·외교적 대가를 요구할 것인데, 한국이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연합훈련 중단 또는 축소, 미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중단 등 한·미동맹과 확장억제를 약화시키는 '군사적 대가'일 것이다. 그것이 정부에 부여될 일차적 동맹외교 과제일 것이다.
◇정론에 입각한 핵정책 기조로 전환해야
하지만 한국의 위정자들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엄습하고 있는 핵위기를 인식하는 상태에서 핵군비통제가 작동해 온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당사국들이 협상을 통해 핵군사력을 상호 줄이거나 해체하는 핵군비통제는 한쪽이 일방적 우위를 선점한 상태에서는 성사되지 않는다. 진정한 협상은 양국 모두가 핵대치가 강요하는 부담을 공유하는 '통나무 타기(log-rolling)' 상태, 즉 상대방이 물속으로 떨어지면 이쪽도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도에서만 가능하다. 대기권 핵실험금지조약, 핵무기비확산조약(1970 NPT), 미·소 전략핵감축협정(1991 START) 등도 이런 원리로 성사된 것이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1991년 핵물질감시통제기구(ABACC) 설립을 통해 상호 핵개발을 포기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은 반대쪽 길을 걸어왔다. 1991년 '비핵화 선언'을 통해 우리는 핵무기 원료인 고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생산하지 않을 것이니 북한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남북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했지만, 위정자들은 북한은 어차피 준수하지 않을 것이므로 한국의 손발만 묶게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경청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남북 간 핵비대칭 상태에서 북한의 갑질에 시달리면서 미국의 핵보호 공약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먼저 발가벗고 상대에게도 벗어달라고 애원하는 방식으로는 북핵을 통제할 수 없다. 한국은 대내적으로 '핵자강'을 위한 준비를 해나가면서 미국을 향해서는 북한이 핵무력 증강을 강행하면 미 전술핵 재배치, 한·미 핵공유 등을 통해 북핵에 상응하는 핵역량을 한국에 배비(配備)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하여 핵동맹으로 가겠다고 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즉, 미·북 핵협상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강온 양면의 카드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 것이 안보정론에 입각한 핵정책이다.
김태우(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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