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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흔 위에 피어난 기억과 화해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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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08. 12:52

연극 '그들의 봄날'
제1회 보훈연극제 공식 참가작
세대와 이념을 넘어선 위로와 공감의 서사
가극배우였던 할아버지와 시니컬한 손녀의 일상
서로 다른 시대의 상처가 만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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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들의 봄날' 커튼콜. 무대 위에서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드는 태성과 희선의 모습은, 극이 남긴 웃음과 여운을 따뜻하게 마무리한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연극 '그들의 봄날'은 단 한 명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단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분단의 시대를 살아낸 이 땅의 모든 가족이 공유하는, 말하지 못한 마음과 눈물의 언어다. 제1회 보훈연극제 공식참가작으로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한때 인민군이자 반공포로였고, 다시 국군이 된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그 서사는 과거를 복기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손녀와의 다층적 관계를 통해, 기억의 층위를 거슬러오르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는가?"

이야기는 평범한 고등학생 희선과, 전직 가극배우였던 할아버지 태성의 티격태격 일상에서 출발한다. 무대 위, 어두운 배경과 집중 조명이 만들어낸 밀도 높은 공간 안에서, 두 인물은 웃음과 신경전을 오가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얼핏 유쾌한 가족극처럼 보이지만, 이 일상의 말장난 속에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억과 상처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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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큰둥한 손녀 희선(신승희 분)과 천진난만한 태성(이민재 분)의 극 중 한 장면. 극과 극의 세대차 속에서도 두 사람만의 리듬이 무대를 채운다. / 사진 창작집단 은결
태성은 여전히 무대 위의 삶을 꿈꾸는 자칭 '예술가'다. 하지만 희선에게 그는 단지 귀찮고 시대착오적인 노인일 뿐이다. 그 사이의 간극은 수많은 말다툼과 불협화음을 낳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란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물들어간다. 특히 태성이 창작의 열정을 드러내며 노래를 부르고, 희선이 이를 가볍게 받아치는 장면은, 유쾌한 웃음 속에 세대 간 감수성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공연이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는 더욱 깊이를 더한다. 희선이 콘테스트 참가를 위해 태성의 곡을 활용하려 하자, 태성은 창작의 본질을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단순히 '예술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과거의 상처와 책임에 대한 고백이 묻어 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비로소 단지 가족이 아닌,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낸 존재로서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그 여정의 정점은, 태성이 잊지 못하는 한 약속에서 비롯된다. 그 약속은 바로 '딸과의 재회'다. 전쟁 중 남한으로 내려오며 자신의 딸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태성은, 그 죄책감과 상실의 감정을 숨긴 채 살아왔다. 손녀와 딸이 같은 이름을 지녔기에, 태성은 희선을 바라보며 현실과 과거를 겹쳐 보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반복되는 망상과 회상의 경계는 객석을 숙연하게 만들며, 그의 치매는 단순한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지켜지지 못한 약속'에 대한 자책이 낳은 고통의 결말로 읽힌다.

이와 같은 서사의 깊이는 배우들의 몰입도 높은 연기를 통해 더욱 풍성하게 확장된다. 태성 역의 이민재는 유쾌한 과장과 섬세한 감정 표현을 넘나들며,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시대를 관통한 죄책감과 노년의 고독, 그리고 무대에 대한 집념이 그의 연기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희선 역의 신승희는 냉소와 애정, 거리감과 연민을 오가는 미묘한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며, 극의 정서적 중심을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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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희선(신승희 분)이 책상 위에 놓인 꽃다발을 바라보는 장면. 무심한 듯 다가서는 시선 속에, 그녀의 마음에도 서서히 변화가 스며든다. (右) 무대 위에서 가극배우 시절을 떠올리며 노래하는 태성(이민재 분). 빛나는 순간을 재현하는 그의 모습은 웃음과 그리움을 동시에 자아낸다. / 사진 창작집단 은결
무대 연출은 단출하면서도 효과적이다. 책상 하나, 쇼파 하나, 작은 조명, 그리고 배우들의 움직임만으로 공간과 시간, 심리의 전환을 유연하게 이끌어낸다. 특히 극 후반부, 치매에 빠진 태성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딸과 손녀를 혼동하는 장면에서는 조명의 농도와 음악이 절묘하게 감정의 파동을 이끌어낸다. 희선의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 잃어버린 시간을 잇는 다리처럼 무대 전체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들의 봄날'은 결국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을 잃어가는 자와 기억을 떠올리는 자,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지 개인적 서사가 아니라, 분단과 전쟁이라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이겨내고자 했던 시대정신의 은유로 읽힌다. 희선의 혼잣말은, 단지 자신의 정체성을 향한 물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질문이기도 하다. 과거의 상처와 기억,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다.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랑은 기억보다 강하고, 진심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비록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노래 한 곡과 손을 잡던 온기는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희선과 태성이 부르는 노래는, 그 어떤 대사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객석을 적신다. 그것은 용서의 노래이자, '우리는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희망의 노래다.

'그들의 봄날'은 '보훈'을 기념이 아닌 질문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연극이다. 이 작품은 영웅을 기억하기보다, 잊힌 이름과 감정을 불러내며 진정한 '보훈'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다. 전쟁의 시대를 지나온 이들이 남긴 상흔을, 세대와 예술, 그리고 가족의 언어로 풀어낸 이 작품은 단지 한 편의 연극이 아니라, 기억을 위한 위로이자 미래를 위한 다짐이다.

그리고 그 다짐은, 무대 밖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다. 그날의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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