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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따뜻한 쇠, 억장을 녹이는 쇳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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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13. 18:19

<12> '철(鐵)박물관'·'종(鐘)박물관'
음성 철박물관과 진천 종박물관
충북 음성의 철(鐵)박물관(왼쪽)과 진천의 종(鐘)박물관
고고학에서는 선사시대의 마지막 단계를 철기시대(鐵器時代)라 부른다. 그런데 아직도 철을 '산업의 쌀'이라 부르니 우리가 사는 지금도 철기시대라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두 박물관을 오가는 여정은 어쩌면 아득한 원시(原始)를 누려보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철박물관은 지난 2000년 '상상 이상의 철(iron beyond imagination)'을 슬로건으로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문을 열었다. 그곳은 고려시대 몽골군을 무찌른 철제무기를 만든 '다인철소(多仁鐵所)'가 있던 곳과 멀지 않다. 야외정원에는 국내 최초의 전기로(電氣爐)와 계근대(計斤臺)를 진열했고, 쇳물을 운반하는 거대한 손잡이 '후크(hook)'가 유물의 대표격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전시는 '철의 역사'에서부터 '철 생산 과정', '생활 속의 철', '철의 재활용', '철과 예술' 등을 담아, '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임을 알게 해준다.

"인류가 처음 사용한 철은 '운석'이다." 박물관 도록을 보다가 발견한 이 한 문장에 기가 꺾였다. 몇만 광년을 불타며 날아온 별똥별에서 우리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니. 원소기호 Fe, 원자번호 26번, 녹는점 1535℃. 별들의 핵융합반응으로 생겨난 금속원소. 지구의 35%를 차지하는 주요한 원소인데, 철박물관을 찾기 전까지 내겐 그저 원소기호로만 존재했던 철. 역사는 철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고민하게 하지만 인류가 꿈꾸는 세상에는 언제나 철이 있었다. 철 위를 걷고, 철에 기대고, 철 속에 머물러 살고 있지 않은가. 철은 가장 뜨거운 곳에서, 가장 강인한 정신으로 태어나 가장 오랜 역사를 만들고 가장 값진 삶을 일구었다. 이제 세계는 오히려 철로 화석 연료를 대체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이다.

용광로의 열기와 차갑고 거칠며 무겁기만 한 물성이 삶의 향기로 변한 전시실에서는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은 물건들이 옛 기억에 실려 나를 향한다. 바늘·가위·자물쇠·경첩·낫·호미·쟁기·국수틀·참기름틀·붕어빵기계·빙수기계·고드렛돌·양철냄비 등에다 단군의 셋째아들 부소(夫蘇)가 불을 발명했다는 신화에서 이름 붙여졌다는 부시까지. 그 틈새에서 엿장수 가위소리와, 놋그릇을 '스뎅(?)그릇'으로 바꾸던 어머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리미를 일본식 발음 '아이롱'이라 부르던 일도 생각났다. 한 바퀴 돌아나오면 누구나 '담금질'되어 있을 것 같은 철박물관에서는 언제나 세상일에 달아오른 마음을 스스로의 망치질로 식혀야 마땅하다. 아직도 '철기시대'이기 때문이다. 애써 만든 24쪽 철박물관 체험지도 내공이 여간 아니어서, 찾는 이를 더 '철'들게 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진천 군립(郡立) 종박물관은 4세기쯤으로 추정되는 고대 철 생산 유적지가 발견된 충북 진천군 석장리에 2005년 문을 열었다. 2012년에는 주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원광식 장인의 기술을 전하는 전수교육관도 개관했다.

전시실은 '종의 탄생'으로부터 '범종의 역사', '한국종의 비밀', '세계의 종' 등으로 이어지는데, 우리 범종의 역사, 소리의 신비, 합금의 비밀 등 역사, 미학, 과학을 한자리에서 알게 되기란 쉽지 않아 더욱 귀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종 11기 중 5기가 일본에 있는 내력, 세계의 종소리로 피치와 템포를 분석해 만든 공식에 대입해 최고의 화음값을 얻은 사연, 독특한 음통과 일정한 배열의 음향학적 장치를 갖추고 있는 우리 종의 과학성 등 복잡다단한 비밀을 다 알려주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한국종을 비롯한 동양의 종들은 밖에서 두들겨 소리를 내지만, 서양종은 안에서 울리기 때문에 소리가 농밀하지 못해 마치 아우성처럼 들린다. 범종은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최대로 커지는 주기적인 음의 변화(맥놀이)가 계속되는데, 종의 좌우균형이 맞지 않으면 맥놀이 또한 불완전하게 된다. 그래서 종을 치면서 음의 변화가 완벽해질 때까지 종 안쪽을 깎아낸다. 물론 어디를 얼마만큼 깎아내야 완벽한 소리를 내는지 알아내는 것은 '구조진동해석'이 적용되는 '과학'이지만, 깜깜한 종 안에서 구도자의 마음으로 일승원음(一乘圓音)을 찾아내는 장인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여기서는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오는 것'과 '도리천을 울려 지옥중생을 깨우는' 그 범상찮은 소리를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

30여 년 전, 나는 '한국의 범종'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얻은 소중한 기억들을 잊지 못한다. 새벽예불 종송(鍾頌)으로 운문사의 새벽공기를 가르던 낭랑한 아미타경 독송, 범종소리를 녹음하느라 작대기로 무논을 치며 개구리 울음을 잠재우던 일, 쇳물과의 질긴 인연 원광식 장인, 성덕대왕신종 소리를 전국에 보급한 국립극장 김용국 과장, '종박사'이신 금속공학자 염영하 교수, 그리고 만나 뵐 때마다 "지극한 도는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귀로 들어서는 들을 수 없다"며 늘 성덕대왕신종 명문을 외시던 고청(古靑) 윤경렬 선생까지. 유독 '생거진천(生居鎭川)' 종박물관에서 새삼스레 떠올랐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생거진천대종각'에서 고래 모양 당목으로 대종의 음관을 크게 한번 울려보고 박물관에 드시길.

두 박물관의 거리는 40㎞ 남짓, 우리의 '철기시대'를 담박에 느낄 수 있는 거리다. 철과 종의 물성을 제대로 느껴보면서, 미래는 더없이 아름다울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 거리다. 나는 그곳에서 그 아득한 쇠의 연원과, 그 쇠로 만들어 전해지는 모든 소리의 비밀로 빈 가슴 가득 채우고 왔으므로, 오늘부터 세상의 모든 종소리는 모두 내가 가지기로 했다.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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